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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9월 25일 수요일

달콤한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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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을 포기할 만큼 가치있는 일이 생길 수 있을까?
달콤한 인생.. 이 영화는 제목과는 달리 주인공은 달콤한 삶과는 거리가 멀다.

하지만 주인공이 꿈꾸는 달콤한 인생을 그는 느꼈다. 해서는 안될 사랑을 그는 자신도 모르게 꿈을 꾸고 만것이다. 사랑은 한순간의 이루어지며, 쉽게 지울수가 없다.


잊으라고 잊을 수 없는 것이 사랑이라는 말...

보스는 그를 죽이려고 한다. 외면상의 이유는 그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라고 하지만, 실재로는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흠모하는 것에 분노를 느낀 것이 클것이다.



자신을 죽이려고 한 조직 전체에 복수를 위해 그는 총질을 해댄다.



영화의 마지막 나래이션은 먼가 가슴을 울린다.

    어느 깊은 가을밤 잠에서 깬 제자가 슬피 울고있었다.

    이를 본 스승은 기이하게 여겨 제자에게 물었다.

   "무서운 꿈을 꾸었느냐?"

   "아닙니다." 제자는 대답했다.

    다시 스승은 "슬픈 꿈을 꾸었느냐?" 라고 물었다.

    "아닙니다" 제자는 대답했다.

    제자는 말했다. "달콤한 꿈을 꾸었습니다"

    스승은 "그렇다면 왜 그리 슬피 울고 있느냐?" 물었다.

    제자는 대답했다.

    "그 꿈은 이루어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과정과 실재, 존재와 시간

우리가 바라보고 있는 세상은 꽉 짜여진 질서가 있는 곳이다.

질서의 바탕에는 매초 매분을 흐르는 시간이 있다.

우리는 질서를 무시하고 살수가 없다.

시간은 거꾸로 흘러갈 수 없으며, 물건은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것이다.

질서를 깨닫는 순간 우리는 질서에 순응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우리는 존재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우리는 대체적으로 먼가를 하는데 앞서 과정을 생각하게 된다.

존재의 이면에는 질서와 시간을 통한 과정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과정이 있으면 결과가 있고, 결과는 실재를 만들어 낸다..

하지만 실재한다는 것을 증명하기란 시간이 거꾸로 갈수 있는지를 증명하는 것 만큼이나 어렵다.

과정은 더 큰 과정을 만들어 내고, 더 큰 과정은 다시 더 큰 과정을 만들어 내면서 결론을 짓기가 무척이나 어렵기 때문이다.

혹자는 결론이 없는 일은 없다라고 말하겠지만, 결론을 내린다는 것은 주관적인 믿음에 불과한 것일 뿐이다.

따라서 우리는 질서 속에서 결과를 꿈꾸며 살아가는 인간이다.

또한 미완성의 세계에 갖혀서 죽음을 기다리게 된다.



이따금 죽음이 인생의 결과이고 마지막이라고 생각을 하곤 한다.

죽음은 삶의 결론일까?

그렇게 믿고 싶은지도 모른다.

아무도 모르는 그 너머에 다른 과정이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우리는 삶의 과정 속에서 우리 스스로의 존재를 망각하고 산다. 또 현재의 환경에 만족하면서 동화되어 간다.

환경은 우리를 조종하고, 우리는 자신만의 질서를 만들고 흐믓해한다.



삶은 질서 속에서 결과를 향해 달려가는 마라톤의 연속이다.

우리는 그 속에서 만족을 얻고, 즐거움을 얻으며 행복한 삶을 살아야 한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공

이 작품은 낙원이 아니며 행복도 없는 ‘낙원구 행복동’을 배경으로 소외 계층을 대표하는 난장이 일가의 삶을 통해 도시 재개발 뒤에 숨은 소시민의 아픔을 그리고 있습니다. 이 작품의 주요 등장인물인 난장이네 가족은 재개발지역에서 가난하게 살고 있는 5명으로 구성된 가족이며, 작품의 전개는 3명의 자식의 시각에서 각자의 관점에서 가족이 처한 현실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1장에서는 큰 아들 영수가 주요 서술자로 등장하며, 내용의 주요 핵심 사건인 집의 철거 통지서를 받는 내용과 가족들의 삶의 역사를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영수는 다른 어린 동생들에 비해 정확하게 자기 가족의 가난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습니다. 선조부터 대대로 내려온 뿌리 깊은 가난과 그 가난 때문에 자신도 가난을 되 물림 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열심히 공부에 매진하고 있습니다.
2장에서의 주요 화자로 다루었던 둘째 영호는 영수에 비해 좀 더 객관적으로 가난이라는 것을 표현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이면에는 자신의 가족이 처한 현실이 왜 그런지 형에 비해 구체적으로 알고 있지는 못하지만, 아버지와 어머니를 곁에서 바라보며 자신의 가족의 가난에 대한 슬픔을 간접적으로 느끼고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이를 아버지와 어머니의 행동을 자신의 눈으로 묘사함으로서 느끼는 슬픔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3장에서의 영희는 여자의 몸으로서 가족을 위해 몸을 희생하면서까지 투기업자로부터 집의 소유권을 찾아오게 됩니다. 비합리적인 방법이긴 하지만, 가난의 대를 끊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저지르는 죄에 죄책감을 느끼지만, 결국은 꿈을 짓밝히게 된 아버지의 자살에 오열하는 영희의 모습에 오히려 더 측은하게 만들게 하는 만드는 요소가 되었다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각 장마다 세 명의 화자의 시각으로 바라본 한 가족이 집을 잃게 되는 이야기를 소설 전반에 걸쳐 서술하게 됩니다. 이러한 전개를 통해 현실에서 고통을 받는 위치에 있는 가족의 이야기를 알게 되는 과정에서 저는 무척이나 저의 마음을 아프게 했습니다. 그리고 그 화자들의 고통이 무엇일까 곰곰이 생각하게 되면서 진정으로 소설의 제목은 주인공들이 꿈꾸는 이상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의미라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난장이 가족의 가장인 아버지는 꿈이 있습니다. 남에게 천시를 받는 난장이로서, 부양해야 할 가족도 있으며, 몸도 많이 쇠약하여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었지만, 늘 책을 읽으며 우주로 쇠공을 타고 우주로 날아가겠다는 꿈을 꾸고 있습니다. 아들이 자신의 꿈 이야기를 듣고 무시하지만 그는 오히려 사람은 꿈을 가져야 한다고 야단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그의 쇠공이야기는 그의 못다 이룬 꿈인 써커스의 주인공을 꿈꾸는 것과 같은 맥락에서 생각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가 입으로 항상 말하는 우주는 멋진 관객들로 둘러싸인 써커스 장이며, 가장은 현실과 동떨어진 반면 가족들은 그러한 이상에 반대합니다. 이상에 집착했던 아버지는 결국 집을 잃자 곧 자살로서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꿈을 꾸는 가난한 자에게 결국 꿈을 빼앗은 건 꿈이 없는 자들의 포기이기도 하고, 근본적으로는 그 꿈을 가진 자들의 이익을 위한 탐욕이었던 것입니다.
이 작품은 오늘날을 살아가는 모든 소시민들이 잘 안다고 생각했던 소외계층의 아픔을 너무나 사실적으로 그려내고 있었습니다. 특히나 저에게 공감을 일으키는 부분이 몇 구절 있었는데, 특히 ‘천국에 사는 사람은 지옥을 생각할 필요가 없다. 그러난 우리 다섯 식구는 지옥에서 살면서 천국을 생각했다.’ 작품의 도입부에 나오는 영수의 생각으로, 가난한 자의 서러움을 모르는 자는 그들의 서러움을 모르며, 가난한 자들은 항상 부자가 되고 싶다는 꿈을 꾸고 산다는 것을 아주 잘 표현한 구절입니다. 이는 도시빈민의 궁핍한 생활, 그리고 자본주의의 모순에 찬 구조 속에서 노동자의 현실적 패배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작품에서 드러난 문제는 우리사회가 당면한 엄연한 현실적 문제이자 풀어야 할 과제인 것입니다. 또한, ‘아버지를 난장이라 부르는 악당은 죽여 버려.’ 라고 생각하는 자식의 마음에 너무나도 처량하고 가엽기까지 했습니다. 이들이 겨우 난장이의 자식으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이렇게 고통 받고 학대받아야 하는가? 전 그러한 현실을 실감나게 그들의 마음과 눈으로 표현한 이 작품의 묘사에 찬사를 보낼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 작품은 있는 자와 없는 자간의 괴리를 너무나도 잘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세상은 공부를 한 자와 못한 자로 너무나 엄격하게 나뉘어져 있었습니다.’란 글귀에서와 같이 얼마나 이 세상은 불공평한지 그리고 배운 자들은 곧 부자들이라고 생각이 되었습니다. 전 어렸을 때 나는 마냥 사회가 공평하다고 보았고, 가난한 사람들은 옛날이야기에서와 같이 게으르기 때문에 가난하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렇게 때문에 그런 사람들이 불쌍하지만 자기가 자초한 일이어서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 책을 읽으면서, 그리고 저 나름대로 세상을 살면서 저 스스로도 부자는 아니었기에 세상이 불공평하다는 것 알 수 있었습니다. 영수의 말대로 ‘세상은 학교 안에서 배운 것과는 정반대로 움직였습니다.’란 구절과 같이 TV에서나 보던 가난한 사람들의 모습은 엄연한 현실이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들의 가난은 그들의 게으름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부모가, 또 그들의 부모의 부모가 가난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여유가 있는 자들은 그들의 행복을 빼앗아 대신 행복을 누리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내 주변의 모든 것에 대하여 감사하고 내가 얼마나 행복한 삶을 살고 있는지 깨달았습니다. 저는 그동안 세상에 너무 무관심했던 것 같습니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 저에게 준 충격은 말로 표현을 할 수 없을 정도로 큰 충격이었지만 한 가지 좌우명을 가슴 속 깊이 아로새기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래! 그들을 외면해서는 안된다. 내가 받은 만큼 나보다 못한 사람들에게 베푸는 삶을 살자!’ 라고..
사실 이 작품에 담겨 있는 소외된 도시 근로자의 여러 문제는 우리 사회가 당면하고 있는 현실의 문제입니다. 즉, 생존에 필요한 최저 수준에도 못 미치는 저임금, 열악한 작업환경, 고용자로부터 강요되는 부당한 노동행위, 노동조합에의 탄압, 폭력으로 저항할 수 밖에 없는 그들의 마음, 그리고 가진 자들의 위선과 사치, 그들의 교묘한 억압방법 등 산업 사회의 부정적 측면들이 제시되어 있습니다.
오늘날은 빈민가가 많이 줄었다고 생각하는 대도시 서울에서도 재개발 후 자신의 집터를 헐값에 팔리는 것을 반대하는 입주민들의 거센 저항으로 많은 목숨을 잃은 뉴스를 여전히 접할 수 있습니다. 그들과 이 소설의 주인공이 다른 점이 거의 없을 정도로, 그들이 처한 환경은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점점 더욱 개인적인 삶을 중요시하는 도시사회에서, 남이 무엇을 하던 신경 안 쓰는 경향이 강해졌고, 이전 사회보다 더 각박해진 것이 현실입니다. 삶을 살아가는 모습은 다양하지만,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란 소설의 주인공들은 이 세상 그리고 앞으로도 다른 형태로 나타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린 그 소외계층에 대해 한번 쯤 더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얼마 전 철거민들이 경찰 탄압에 반대하여 저항을 하다가 큰 불로 목숨을 잃었고, 이들의 분향소를 찾은 이 작품의 작가 조세희 씨께서 이렇게 말을 했다고 합니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 출간된 지 30년이 지났는데 같은 일이 반복이 되고 있어, 그런데 그 방법은 더 야만적이고 더 미개해지고 더 끔찍해진 것 같아.” “소설 속의 난장이는 강제철거를 당한 후 삶의 희망을 빼앗긴 채 굴뚝 속에서 자살을 했고 2009년 용산의 세입자들은 옥상에서 철거에 저항 하다 불에 타죽었습니다” 우리는 아직도 우리 주변에 살고 있는 못난 난장이들이 쏘아올린 작은 공을 보지 못하고 살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다시금 희망을 가지고 살고 있는 가난하고 못난 사람들에게 조금이나마 관심을 가지고 살아야겠다고 느꼈습니다.

리틀 빅 히어로

영화는 솔직히 배우 때문에 보게 된 영화입니다. 제목에서부터 풍겨오는 이미지는 험난한 여정을 떠나는 판타지에 어드벤쳐 느낌이 들지만, 현대판 왕자와 거지와 같은 스토리 구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스토리가 전개되면서, 짜임새 있는 스토리와 뻔하지만 의미있는 소재는 영화가 주는 것이 배우가 아닌 영화 자체로 저에게 다가왔던 기억이 납니다. 그 덕에 전 영화를 3~4번씩 다시 봤던 기억이 나네요.이 작품은 내게 더스틴 호프만의 연기가 얼마나 대단한지 그리고 영화 전반적으로 흐르는 언론의 위력이 어떤 것인지 잘 느낄 수 있게 해준 작품이었습니다. 이 영화의 줄거리는 그다지 복잡하진 않습니다. 동화로 따지자면 왕자와 거지와 비슷하기도 하고, 때로는 구두를 찾는 신데렐라와 비슷하죠. 언론의 허구성과 광범위한 전달성을 통해 진짜 주인공이 아닌 다른 사람이 영웅으로 만들어져 버리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 영화의 비운의 주인공인 버니 역의 더스틴 호프만은 가족들에게 버림받고 이혼 당해 혼자 살고 있는 인물입니다. 그는 가정에서는 아무 것도 책임지지 못하는 무능력한 가장이고 사회에서는 소매치기 장물 거래를 하면서 하루 하루를 살아가는 범죄자로서 장물아비며 좀도둑입니다. 그는 자신을 법정에서 변호해준 국선 변호사의 지갑을 소매치기 할 정도로 좀 특이하고 뻔뻔한 성격의 인물로 나옵니다.이따금씩 자신의 아들을 만나 우스꽝스러운 자신의 생활 신조를 떠벌리며 자신처럼 따르라고 가르치려고 하죠. 그의 하는 언행을 통해 그의 생활 신조를 면면히 알 수 있는데 그가 말하는 자신의 자랑스러운 생활 신조는 험난한 정글과 같은 이 세상에선 조용히 살아야 한다 입니다. 그는 진정 이세상에 살아가는 수많은 일반 사람들처럼 복잡한 것은 피하고 단지 피해만 보지 않고 살아가는 평범한 인물의 표본인 것입니다.어느 비 오는 날, 아들과 영화를 보기 위해 집에 가던 버니는 뜻밖의 비행기 사고를 현장을 만나게 됩니다. 어느 소년과 약속을 한 버니는 그 아이의 아버지를 구하기 위해서 불타는 비행기 안으로 들어가고 본의 아니게 많은 사람들을 구하게 됩니다. 이 때 여기자인 게일(지나 데이비스) 을 구해주면서 이야기는 꼬이게 됩니다. 그녀는 밤중 폭발의 사고 현장에서 버니를 알아보지 못했고, 단지 그는 구두 한 짝만을 사고 현장에 남겨둔 체 사라져 버립니다. 하지만 그런 엄청난 일을 했지만 버니는 그저 태연한 듯 자신이 구두를 잃어버린 것만을 원망할 뿐입니다.버니는 우연히 길에서 얻어 탄 존이란 거지의 트럭에서 자신이 했었던 비행기 사고현장에서의 무용담을 존에게 늘어놓았고, 그때 잃어버린 구두 한 짝에 대한 불평을 존에게 말해주곤 자신의 한 짝의 구두를 그만 차에 남겨두고 가버리게 됩니다.사고 이후 구출 된 게일은 tv 특종기사로 만들기 위해 비행기 폭발의 위험을 무릎 쓰고 수 많은 사람들을 구해낸 영웅을 찾기 위해 tv라는 매체를 이용합니다.이때부터 게일은 뉴스의 언론 이용하여 영웅 부풀리기에 앞장서게 됩니다. 그 이후로 영웅의 이야기는 점점 커지고 사태는 엄청나게 커지게 됩니다. 급기야 영웅에게는 엄청난 현상금이 걸리게 되었고, 영웅 찾기 보도에 대한 사람들에게 점점 호기심을 유발하게 만들었고 조금씩 확대 과장되어 영웅 아닌 영웅을 만들고야 말았습니다. 급기야는 얼굴 없는 주인공은 국민적인 영웅으로 부상하게 되고 맙니다.이 때 거지 존은 버니가 두고 간 구두 한 짝과 버니가 했던 말을 이용해 자신이 영웅이었다라고 나서게 됩니다. 그리하여 그는 순식간에 국민적인 영웅의 주인공으로 부상하게 되었으며 이때부터 존은 고아원, 병원, 양로원 등의 외로움과 고통 받는 이들과의 만남을 시작하게 됩니다. 존은 자신이 한 일도 아니었으며 천성이 착해서였는지 자신의 한 일을 낮추려고 하지만 주위 사람들은 그런 그에게 겸손한 마음을 배우게 되고 더욱 그를 신뢰하게 됩니다.그의 영웅적인 행동에 귀감이 되었던 모든 사람들은 그의 부드러운 말씨와 희망이 담긴 조언에 새 희망을 찾게 되었고 꺼져가는 생명을 되살아나게 하는 기적적인 장면을 만들어내게 하기도 합니다. 그는 비행기 사고 이후보다 더 영웅이 되어 가게 되버립니다. 하지만 이때 정작 주인공이 되어야 할 버니는 사고 때 얻은 게일의 신용카드를 불법으로 팔려 하다가 감옥까지 가게 됩니다.버니는 감옥에서 우연히 보게 된 존의 뉴스를 통해 자신이 존의 자리에 있어야 할 주인공이란 것을 알게 되고, 존에게 찾아가 돈을 뜯어낼 궁리를 하게 됩니다.버니는 자신의 진실을 증명하기에 너무 두터워진 존의 위상에 어쩔 수가 없었지만 그런 와중에 때마침 존이 자신의 양심의 가책을 못 이겨 투신 자살을 시도하게 됩니다.버니는 위험을 무릅쓰고 존에게 다가가 설득을 시도하게 됩니다.버니는 생각을 바꿔 그 자신이 영웅이 되기엔 부족하며 존의 선행에 진실한 영웅이라고 말해줍니다. 그는 단지 자신에게 금전적인 보상만을 바라며 진실을 절대로 말하지 않겠다고 약속합니다.저는 이 장면에서 버니가 제시한 존과의 거래가 특유의 버니 적인 이득을 챙기는 수법이기도 했지만, 단지 순간을 모면하기 위한 뻔지르르한 말보다 그만의 절묘한 해법이 아니었다 생각합니다.존은 그 협상에 응하여 자살을 포기하고 영웅으로 돌아오려고 하지만 이때 버니는 그만 자신의 실수로 높은 건물의 벽에 매달리게 되었고 존은 그런 버니를 구해내어 다시 한번 영웅으로 거듭하게 됩니다. 버니가 죽으면 모든 비밀이 지켜질 것임에도 존은 그런 버니를 구해내고야 맙니다.마지막 장면에서 기자들과의 인터뷰 도중, 존은 이렇게 말합니다. 어느 순간에 사람들은 자신의 영웅적 자질을 발휘하게 된다. 그때 매스컴은 한 순간에 그 사람을 영웅을 만들어 낼 수 있다. "사람들은 누구나 영웅이 될 수 있다" 라고...
분명 영화에서의 여기자 게일은 거대 미디어를 통해 이익을 노리는 사람입니다. 미디어는 그러한 사람을 이용해 이익추구를 선도하는 과정에서 진실을 왜곡하고 가릴 수 있습니다. 돈과 매스미디어는 지구 상에서 어떠한 권력보다 큰 힘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리틀 빅 히어로란 영화는 그런 매스미디어의 위력적인 힘을 한 인물이 영웅화 되는 과정을 통해서 여실히 현실감 있게 보여 주었습니다.이 영화에선 존이 방송의 영웅화 전략을 통해서 국민적 영웅으로 부상하게 됩니다. 또, 그런 와중에 뜻하지 않게 존은 선행을 하게 되었고 생명을 잃어가던 한 소년이 살아나기도 하죠. 이는 어떻게 보면 미디어의 좋은 점으로 보이기도 하겠지만, 이는 근본적인 일은 아닐 것입니다.무분별하게 미디어를 활용하여 그저 자기 배만 불리는 사람들은 문제라고 봅니다. 광고주의 인기를 얻기 위해 프로그램에 지나칠 정도로 폭력성이나 선정성을 강조하고, 허위 사실을 보도하는 등의 일은 돈만을 추구하는 영화의 게일과 같은 기자는 자신으로 인해 많은 사람이 나쁜 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무자비한 미디어의 전략에 사람들은 그저 무비판적인 수용자가 되어버립니다. 존이 그저 국민적인 영웅으로 부각되면서 어느 누구도 그가 영웅이 아닐 수 있다 란 생각을 하지 못하듯이 말입니다. 버니가 자신이 사람들을 구해내었다고 말하려고 해도 단지 사람들은 사람을 구해낸 영웅으로서는 잊어버리고 주위 사람들이 우상으로 여기는 영웅으로서의 존재로 생각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존 처럼 착한 마음으로 미디어를 이용해 좀 더 나은 세상으로 이끌 진정한 영웅들이 이 세상에 많아질 것이라 기대를 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