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9월 26일 목요일

GO 프로그래밍 언어의 가치

Go언어는 구글에서 나온 서버프로그래밍을 위한 새로운 프로그래밍 언어입니다. 이 언어는 유명한 컴퓨터 과학자인 Ken Thomson과 Rob Pike가 작성하였고, 개발 생산성과 성능의 두가지를 한번에 잡을 수 있는 언어입니다.

얼마나 자주 창조적인 개발을 위한 생산성과 실행 속도를 고민해보셨는지 생각해보셨나요?

Go로의 시작
Go를 이야기 하기 전에 제가 어떻게 Go라는 언어에 이끌렸는지 먼저 이야기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저는1995년 부터 C언어를 알았고, 2001년에 PHP언어를 시작했습니다. 당시에 PHP언어는 객체지향과는 거리가 멀었고, 에러 처리에도 미흡했지만 웹어플리케이션을 만드는데 있어서,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은 언어였습니다.  먼저 저는 아래의 두가지 중요한 사실을 알 수 있었습니다.
  1. "객체지향"은 단지 프로그래밍의 한 방법일 뿐이다. 프로그래밍의 필수조건은 아니다. 개발 전체 시간에서 최고의 가치를 가지지 않는다.
  2. 데이터 모델에서 자유로운 변수 형태와 다양한 배열, 맵등의 지원은 개발 생산성을 향상시키며, 중요한 가치를 가진다.
 PHP는 작은 프로그램을 빠르게 작성하는데 탁월하지만, 모호한 변수타입으로 인해 프로그램을 테스트 하거나 디버깅하는데 그렇게 쉽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런 이유로 느리죠.
저는 2005년에 자바를 시작했는데, 자바는 제가 그동안 알았던 언어 중에 가장 실망스러운 것이었습니다. 지나치게 엄격한 타입을 가지고, 지나치게 장황하게 늘어놓죠. 무엇보다도 무거웠습니다. 꽉 짜여진 클래스에 코드를 담아 무작정 퍼나르며 생각없이 받아 먹는 하나의 캡슐약을 연상시켰습니다. 모든 IDE와 프레임워크, 컴파일 환경등등 지나치게 복잡하고 일이 많았습니다. 초기 개발 시간은 환경 설정에 시간이 많이 흐를정도로 군더더기가 많습니다. 특히나 자바VM은 큰 비용을 필요로 하다는 것입니다.

이후 얼마 안있어 자바대신에 파이썬을 선택했습니다. PHP에서 지원하지 않는 멀티 쓰레드나 불편한 백엔드 시스템 콘솔 개발을 위해, 선택한 언어였습니다. 언어의 기술은 간결했고, 짧은 코드에 강력한 기능을 보여주는 언어였습니다. 실제로 2009년에는 파이썬으로 모바일 프레임워크로 핸드폰을 개발하면서 파이썬의 가능성이 무한하다는 것도 느꼈습니다.
PHP와 같은 인터프리터 언어로 컴파일 없이 수정과 실행을 반복하면서 언어의 개발 속도도 빨랐습니다. 그러나, 파이썬의 문제는 느리다는 것입니다. 모바일 기기에 들어간 파이썬은 하드웨어를 읽어들이는 부분에서 속도의 이슈를 보이면서 오작동을 일으켰고, C로 바인딩하여 해결하기에 버거운 수준이었습니다.

파이썬으로 개발을 시작할 무렵, 구글이 이 언어를 선택했고, 파이썬을 창시한 Guido van Rossum을 채용하는 것을 보며, 앞으로 잠재력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최근에 구글로 부터 새로운 언어 Go가 나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쟁쟁한 컴퓨터 역사의 인물들이 개발에 참여했다는 사실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Go는 2009년에 발표되었습니다. 저는 2012년에 이 언어를 알게 되었는데, 저는 이 언어가 얼마나 대단한지, 초기에는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Go와 작업하기
저는 프로젝트의 프로토타입을 작업하면서, Go의 가치를 알 수 있었습니다.

  1. 컴파일러 언어의 이점 : 저는 컴파일러 언어로 돌아가는 것에 대한 이점을 알고 있습니다. 컴파일러는 프로그램이 실행가능한지 여부를 이론적으로 판단하여 에러를 체크할 뿐 아니라 이후에 문제를 해결하도록 에러를 도출 합니다. Go의 특별한 능력은 아니라 할 수 있지만 Go는 인터프리터와 함께 컴파일 기능을 동시에 가지고 있습니다.
  2. 표준 포맷 : Go는 C나 PHP보다는 엄격한 코딩 포맷을 가지고 있습니다. 파이썬보다는 덜 엄격하지만, 파이썬의 포맷보다 유연합니다.
  3. 작은 언어 : Go는 아주 작고 쉽게 설치가 됩니다. 이는 프로그래밍을 배우고 시작하는데 도움을 줍니다.
  4. 많은 기능 들 : Go언어는 파이썬과 같이 많은 서버프로그램의 기능을 언어 자체에 내장하고 있습니다. 가령, 웹서버를 돌린다거나 소켓 서버를 작성하는 것, OS의 내부 기능을 엑세스하는 것등 파이썬과 거의 유사하게 이용할 수 있습니다.
  5. 쉬운 다중 작업 : Go의 채널과 go루틴은 다중작업을 쉽게 처리하도록 해줍니다. 이는 Node.js와 파이썬의 Twisted보다 나은 기능을 제공합니다. 
  6. 쉬운 시작 : Go를 배우는데 시간이 그렇게 오래 걸리지 않습니다. 개발 환경도 컴파일러와 에디터만 있으면 바로 시작 가능합니다.
  7. 빠른 개발 속도 : Go의 개발 생산성은 무척 높습니다. 언어 내부에 공용 서버 컴포넌트가 있어 복잡한 서버를 빠른 시간안에 작성 할 수 있습니다. 적은 코드는 정확한 기능을 빠르게 만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8. 멀티코어 지원, 높은 성능 : 언어의 실행은 놀랍게도 빠르고 안정적입니다. 심지어 파이썬으로 개발하는 사람들에게는 경이적이다는 생각까지 들 정도입니다. 파이썬과 Node.js의 런타임과는 달리 Go의 런타임은 다중 OS 쓰레드를 지원하고, 동시적인 실행기능을 지원합니다.

생산성 향상을 위한 Go언어
Go언어의 일부 특징은 프로그램을 작성하고 배포하고 나서 알 수 있는 것들이 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한 Go언어의 장점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은 아래와 같습니다.

  1. 단일 실행파일 : Go는 정적으로 링크된 바이너리를 만듭니다. 이는 파일 하나에 모든 것을 넣고, 소스를 빌트하면 바로 작동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특징은 오늘날 클라우드 기반의 배포 환경에서 유리합니다. 왜냐하면 배포되는 대상 서버에서는 기준 서버의 환경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2. 크로스 컴파일 : 자바는 이부분에 대해서 완벽하지 않습니다. Go언어는 맥에서 작성되고 테스트 된 프로그램이 리눅스에서 완벽하게 컴파일 될 수 있음을 보장합니다. 그리고 대상 시스템을 맞는 옵션으로 컴파일을 하여 바이너리를 대상시스템으로 복사하면 바로 작동이 가능합니다.
  3. 설정을 빌트인 : 몇줄의 코드로 CPU, 메모리, lock여부등의 시스템 자원 정보를 프로그램에 담을 수 있습니다.

결론
저는 Go언어가 최고의 서버 프로그래밍 언어라고 생각합니다. Go는 파이썬의 모던한 개발 방식과 C와 C++의 속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Go언어가 쉽게 개발되고, 많은 복잡한 시스템에 쉽게 배포되는 환경속에서도 개발 생산성과 속도를 다 동시에 만족시켜줍니다. 그리고 표준화되는 코드포맷과 작은 언어 스팩, 명확한 코드기술을 통해 협업을 하는데 이점을 줄 것입니다.

2013년 9월 25일 수요일

RSA Cipher

소 개
RSA는 공개키 암호시스템의 하나로, 현재 전자 상거래 등에 광범위하게 이용되고 있다.1977 년 로널드 라이베스트, 아디 샤미르, 레오널드 애들먼이 발명하였으며, RSA라는 이름은 이 3명의 이름 앞 글자를 딴 것이다. 이 세 발명자는 이 공로로 2002년 튜링상을 수상했다. RSA 암호체계의 안정성은 큰 숫자를 소인수분해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에 기반을 두고 있다. 만약 큰 수의 소인수 분해를 획기적으로 빠르게 할 수 있는 알고리즘이 발견된다면 이 암호 체계는 가치가 떨어질 것이다. 1993년 피터쇼어는 쇼어 알고리즘을 발표하여, 양자 컴퓨터를 이용하여 임의의 정수를 다항 시간 안에 소인수분해하는 방법을 보였다. 따라서 양자 컴퓨터가 본격적으로 실용화되면 RSA 알고리즘은 무용지물이 될 것이다. 그러나 양자 컴퓨터가 이 정도 수준으로 실용화되려면 아직 여러 해가 더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RSA 암호화 알고리즘은 1983년에 발명자들이 소속되어 있던 매사추세츠 공과대학교에 의해 미국에 특허로 등록되었고, 2000년 9월 21일에 그 특허가 만료되었다.

개 요
RSA 는 두 개의 키를 사용한다. 여기서 키란 메시지를 열고 잠그는 상수(constant)를 의미한다. 이 중 공개키(public key)는 모두에게 알려져 있으며, 메시지를 암호화(encrypt)하는데 쓰인다. 이렇게 암호화된 메시지는 개인(비밀)키(private key)를 가진 자만이 해독(decrypt)하여 열어볼 수 있다. 다시 말하면, 누구나 어떤 메시지를 암호화할 수 있지만, 그것을 해독하여 열람할 수 있는 사람은 개인키를 지닌 단 한 사람 뿐인 것이다. RSA는 소인수분해의 난해함에 기반하여, 공개키만을 가지고는 개인키를 쉽게 짐작할 수 없도록 디자인되어 있다. 보다 이해하기 쉬운 예를 들자면, A라는 사람에게 B라는 사람이 메시지를 전하고자 할 때 B는 A의 열린 자물쇠를 들고 와 그의 메시지를 봉인하고, 그런 다음 A에게 전해 주면, 자물쇠의 열쇠를 가지고 있는 A가 그 메시지를 열어보는 식이 된다. 중간에 그 메시지를 가로채는 사람은 그 열쇠를 가지고 있지 않으므로 메시지를 열람할 수 없다. 그리고 RSA의 디자인 상, 그 열쇠는 자물쇠의 형태만 보고서는 쉽게 제작할 수가 없게 되어 있다.
이와 같은 암호에 기본적인 이론을 재고하는 수학이 정수론이 다. 이런 아이디어를 수학 적으 로 말하면 암호화과정을 하나의 함수로 볼 때 암호의 해독과정은 그 함수의 역함수를 찾는 작업이다. 따라서 역함수를 구하기 매우 어려운 함수가 무궁무진하듯이 해독이 거의 불가능한 암호도 많은 것이다. 암호에 쓰이는 계산방법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는 다르다. 하지만 모르는 사이에 우리는 메일 이런 계산을 하고 있다. 시간 계산의 예를 보자 5시에서 3시간 후는 8시이고 이것을 식으로 쓰면 3+5=8 이다. 그런데 11시에서 5시간 후는 4시이므로 11+5=4가 된다 이것을 12가법(NOD)인 계산이라고 한다. 12가 아닌 다른 것도 법이 될 수 있으며 덧셈과 뺄셈 외에도 곱셈과 나눗셈도 가능하다. 이러한 계산과 관련되어 페르마의 작은 정리 라는 것이 있다. X가 소수일 때 a의 x제곱은 x를 법으로 하는 a와 같다는 것이다. 요일계산을 예로 들면(이때 7이 법이다) 1일이 월요일인 달의 21일은 3의 7승이므로 이 정리에 의해 3일과 같은 요일 즉 수요일이 된다. 78년 미국 mit 의 리베스트 샤미르에이들만이 제안한 RSA 암호체계는 페르마의 작은 정리와 함정합수의 개념을 이용했다.
암 호화에 사용되는 법과 암호화열쇠는 공개하지만 암호문을 가로챈 제3자는 해독열쇠가 없어 암호를 읽을 수가 없도록 만든 것이다. 이 때 열쇠를 알아내는 방법은 자연수의 소인수 분해와 관련돼 있는데 수가 커지면 이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예를 들어 1초에 1백만 번 연산을 할 수 있는 컴퓨터를 이용하여 현대에 알려진 가장 빠른 방법으로 계산해도 1백자리 숫자를 소인수 분해하는 데는 1백년이 걸린다고 한다. 더구나 재래식 방법으로는 우주의 역사보다도 긴 시간이 필요하다 따라서 이러한 암호체계는 소인수분해에 대한 새로운 수학적 발견 이 없다면 깨뜨리기가 불가능한 것이다.
실 제로 정수론을 전공하는 많은 수학자들이 효과적인 소수 판정방법과 소인수 분해 방법을 찾는 연구를 하고 있으며 연구결과가 군사기밀 혹은 기업비밀로 분류되기도 한다. 소수 판정방법의 연구가 안정한 암호화 열쇠를 만들기 위해 필요한 연구라면 소인수 분해방법의 연구는 이러한 암호체계를 깨뜨리기 위해 필요한 연구라고 할 수 있다. 한편 미국 버클리 대학의 렌스트라는 최근 타원곡선 이론을 써서 큰 수를 효과적으로 소인수 분해하는 기존의 방법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방법을 발견하여 수학계에 충격과 희망을 주고 있다. 

구 현
RSA 공개키 암호에 사용될 공개 키 {N,E}와 개인 키{N,D}를 생성하기 위해서는 먼저 모든 사용자들은 각각 다음의 작업을 수행하여야 한다.
① 두 개의 큰 소수 p와 q를 선정한 다음에 Modulus N = p * q와 PI(N)을 계산한다.
② 공개키 E는 PI(N) = (p - 1)(q - 1)과 서로 소의 관계가 되게 임의 로 선정한다.
E * D mon PI(N) = 1의 관계에 있는 개인키 D를 "확장된 유클리드 알고리즘"으로 구한다.
④ {E,N}을 공개키로 공개하고, {D,N}을 개인키로 자신이 안전하게 보관한다.
그 다음 RSA 암호의 암호화를 위해서는 먼저 암호화된 메시지를 받을 수신자의 공개키 {E, N}을 취득한 후에 암호화 할 평문M을 정수 M으로 전환하여 다음과 같은 암호화 작업을 수행한 결과인 암호문 C를 수신자에게 보내고, 수신자는 자신의 개인키를 이용한 복호화 작업을 통해서 원래의 평문M을 복원하게 된다.
RSA암호화 : E(M) = M ^ E mod N = C
RSA복호화 : D(C) = C ^ D mod N = ((M ^ E) ^ D) mod N = M

응 용
RSA 를 응용한 기술로는 전자서명 방식이 있다. 전자서명 방식에서는 송신자가 자신의 비밀키를 이용해 메시지를 복호화 알고리즘에 돌린 결과를 메시지와 함께 전송한다. 이 때 수신자 B는 송신자A의 공개키를 이용해 사인된 메시지를 암호화 알고리즘에 돌려 함께 전송되어온 메시지와의 관계로 사인의 진실 여부를 확인해 볼 수 있다.
한편, 인증 기능의 구조를 서명 등의 [본인 확인]의 케이스로 보면
① 수비 기능에서는 복호의 역할을 다한 비밀 키를 작용시켜 서명 문을 작성한다.
② 그 서명 문을 받은 사람은 서명인이 공개하고 있는 공개 키를 작용시켜 서명이 진짜인가, 어떤가를 확인한다는 것이다.
공개 키를 작용시킴으로써 만약 암호가 풀린다면 그 공개 키에 대응한 비밀 키로 서명되기 때문이어서 그 비밀 키는 서명자만의 비밀이기 때문에 본인 확인이 끝난 것으로 된다는 이론으로 된다. 

참고문헌

사랑은...

사랑은...
우연히 찾아온다.

말을 하지않아도
의도를 하지않아도
사랑인지 아닌지는 단번에 안다.

눈과 입은 마음의 창
그 너머에 본질을 꽤뚫는 순간...
세상에 천둥이 친다.


사랑은...
무언의 언어

말을 하지않아도
의도를 하지않아도
사랑인지 아닌지는 단번에 안다.

행동과 말은 마음의 창
하나로 이어지는 순간...
찌릿한 전류가 흐른다.


사랑은 벽처럼 나에게 다가오지만
극복 후 그 너머엔
또 다른 내가 서 있다

눈꽃을 하얗게 피웠다.

잠을 깨고보니 꿈속에서 보았던 아름다운 눈꽃 세상은

또 다른 꿈 속의 풍경이었다.


이리도 아름다운 풍경이 또 있을까?

황홀함에 난 몸도 마음도 눈처럼 포근하고 부드러워진다.



나 몰래 눈은 그렇게 소리없이 밤새 땅으로 내려왔구나



밖을 나가 눈을 만져본다..  포근한 눈은 만지기엔 너무 차갑다.

그리고 이내 사라져버린다.. 꿈처럼

Love or Like?

그것의 모든 것을 알려고 하는 것이다.

사랑과 앎은 같은 말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에 대해 완벽하게 알게 되면 사랑이 없어지는 것일까?

만일 없어지고 난다면 사랑을 어떻게 유지할수 있을까?



만약 유지가 된다면, 그건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믿음만 남는다면 그건 한편으로 위험할수도 있지만

시간은 추억을 만들며 추억을 통해 서로에 대해 더욱 신뢰를 하게 된다.



그리고 그 뒤에는??

모든 상황을 판단할 수 없게 된다.

그렇다면 그뒤엔..

난 아마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시간

내일이면 모든것이 끝날 것처럼 아끼며 하루를 살아야 하는데

마음의 평온과 알찬 마음

아주 중요한 것이다.



인생은 아주 길면 100세라지만

100년도 어떻게 보면 1년씩 100번일 뿐이다.

이따금 시계를 보지 않고 TV를 보면서 10분을 1초처럼 보내는가 하면, 아침에 일어나기 싫어서 침대에서 시계만 바라보며 1시간같은 1분을 보내기도 한다.

인생은 자기가 얼마나 하루에 충실하느냐에 달려있다

난 얼마나 충실했는가??

얼마나 28년을 잘 보내왔는가??

1년을 1초처럼 보내온 해가 얼마나 될까??



매년 새로운 희망을 가진 나를 생각하며 맞이하겠다.

사람의 관계


사람의 관계는 머라 말할 수가 없다.

아는 사람의 사람으로 연결되는 반면..

모르는 사람끼리도 우연에 의해 친구가 된다.

아는 사람이지만 연락을안하는 경우도 있지만 어떠한 계기에 의해서 연락을 하기도 한다.

전혀 만날수 없을 것 같은 사람도 알수없는 계기로 친구가 되고 연인도 된다...

단지 이런 바탕에는 무난한 성격과 성격이 바탕이 되어야 할듯하다..연락도 자주하고, 욕먹지 않아야 되고..

솔 직히 주변에 먼가 일에 매달리는 사람들을 보면 좀 성격이 괴팍하거나 짜증나는 말투를 가진 사람이 있다. 성공은 했지만 그 성공을 축하하는 사람이 주변에 없는 것, 난 머리가 좋은데 날 도와줄 사람은 없는 것.. 많이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진정한 친구는 별로 없고, 결혼식이나 특별한 때에 하객이 별로 없는 경우도 인생의 아픔이 될 것이다.

난 잘보이려고 노력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나의 이름을 들었을때 최소한 짜증은 안나는 사람이 되고 싶다.

난 믿는다 남에게 상처를 주면 반드시 돌아온다는 것을...

회상

약간 선선한 바깥 날씨..

뜨거웠던 몸을 샤워로 식혀주고, 뽀송뽀송한 피부를 새옷으로 감싸며, 이따금씩 불어주는 서늘한 바람을 맞고, 난 멀리서 바라보이는 빨갛고 노랗고 파란 네온등과 희미하지만 덜 어두워진 하늘을 본다. 그 빛을 반사하며 흐르는 냇가..

여유있게 생각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이 있고

조용하면서 잔잔한 음악이 흐른다.



난 이 모든 것을 느끼며 창가에서 밖을 바라 보고 있다.



그리고 생각한다. 여긴 내 방이 아니다. 난 한적한 멋진 곳에 있다고, 멀리 가지 않더라도 내 방에서, 난 멀리 떠난 것 같은 여행의 즐거움을 잠깐이나마 느낄 수 있다.



오래전에 떠났던 여행의 후유증이 아직도 뇌속에 남아, 가끔씩 되살아난다.

지루한 하루

많이 덥지 않은 날씨..



흐린 하늘



멍한 머릿속..



10분후에는 머할까?



TV를 켰다.. 별로 잘 안보다보니 적응이 안된다.



컴퓨터를 켰다. 먼가 많이 할일이 보이지만 창을 닫아버렸다..

음악을 듣는다.



나의 유일한 낙이다.

할일을 만들면 되는데.. 1시간동안은 그냥 가만히 음악을 듣고 싶다. 1시간 후에는.... 먼가 다른거..?



1시간이 지났지만.. 다른걸 하고 싶지 않다...



지금 이시간이 얼마나 나에게 즐거운 시간인가 생각한다.



잠이 들었다...

사람의 향기

Jazz의 멜로디처럼

처음 듣는 것이라 하더라도

느낌이 전달이 되는 사람이 되고 싶다.



느낌?

사람의 향기

말투, 생김새, 행동, 사고방식, 억양, 목소리...

모든건 음악의 장르와 음식의 향기와 맛을 결정하는 요소가 된다.


나만의 느낌을 만들었다고 생각을 하지는 않는다.

난 억지로 만들기 위해서 과장하고 싶지는 않다

사람의 관계와 생활방식, 생각없이 툭툭 내뱉는 말들..

아직도 나도 모를정도로 두서가 없다

앞으로 부단히 많은 생각과 경험이 필요할꺼라고 생각한다.

달콤한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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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을 포기할 만큼 가치있는 일이 생길 수 있을까?
달콤한 인생.. 이 영화는 제목과는 달리 주인공은 달콤한 삶과는 거리가 멀다.

하지만 주인공이 꿈꾸는 달콤한 인생을 그는 느꼈다. 해서는 안될 사랑을 그는 자신도 모르게 꿈을 꾸고 만것이다. 사랑은 한순간의 이루어지며, 쉽게 지울수가 없다.


잊으라고 잊을 수 없는 것이 사랑이라는 말...

보스는 그를 죽이려고 한다. 외면상의 이유는 그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라고 하지만, 실재로는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흠모하는 것에 분노를 느낀 것이 클것이다.



자신을 죽이려고 한 조직 전체에 복수를 위해 그는 총질을 해댄다.



영화의 마지막 나래이션은 먼가 가슴을 울린다.

    어느 깊은 가을밤 잠에서 깬 제자가 슬피 울고있었다.

    이를 본 스승은 기이하게 여겨 제자에게 물었다.

   "무서운 꿈을 꾸었느냐?"

   "아닙니다." 제자는 대답했다.

    다시 스승은 "슬픈 꿈을 꾸었느냐?" 라고 물었다.

    "아닙니다" 제자는 대답했다.

    제자는 말했다. "달콤한 꿈을 꾸었습니다"

    스승은 "그렇다면 왜 그리 슬피 울고 있느냐?" 물었다.

    제자는 대답했다.

    "그 꿈은 이루어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배우는 법

모르는 것을 알기 위해서 시작은 쉬운것부터, 순서대로 차근차근 해야 한다.
장님이 코끼리 만지는것처럼 요리조리 만지다가 애매한 꼬리나 코를 만지는 것보다는 전체적으로 알수 있는 배와 같이 전체적으로 훑어 볼수 있는 부위로 시작해야 한다. 처음에 만지는 곳이 어디냐에 따라서 배우는 방식과 이해 방향은 완전히 달라진다

빨리 배우고 빨리 터득하는 것 이전에, 그에 대한 관심이 바탕이 되어야 함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과정과 실재, 존재와 시간

우리가 바라보고 있는 세상은 꽉 짜여진 질서가 있는 곳이다.

질서의 바탕에는 매초 매분을 흐르는 시간이 있다.

우리는 질서를 무시하고 살수가 없다.

시간은 거꾸로 흘러갈 수 없으며, 물건은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것이다.

질서를 깨닫는 순간 우리는 질서에 순응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우리는 존재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우리는 대체적으로 먼가를 하는데 앞서 과정을 생각하게 된다.

존재의 이면에는 질서와 시간을 통한 과정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과정이 있으면 결과가 있고, 결과는 실재를 만들어 낸다..

하지만 실재한다는 것을 증명하기란 시간이 거꾸로 갈수 있는지를 증명하는 것 만큼이나 어렵다.

과정은 더 큰 과정을 만들어 내고, 더 큰 과정은 다시 더 큰 과정을 만들어 내면서 결론을 짓기가 무척이나 어렵기 때문이다.

혹자는 결론이 없는 일은 없다라고 말하겠지만, 결론을 내린다는 것은 주관적인 믿음에 불과한 것일 뿐이다.

따라서 우리는 질서 속에서 결과를 꿈꾸며 살아가는 인간이다.

또한 미완성의 세계에 갖혀서 죽음을 기다리게 된다.



이따금 죽음이 인생의 결과이고 마지막이라고 생각을 하곤 한다.

죽음은 삶의 결론일까?

그렇게 믿고 싶은지도 모른다.

아무도 모르는 그 너머에 다른 과정이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우리는 삶의 과정 속에서 우리 스스로의 존재를 망각하고 산다. 또 현재의 환경에 만족하면서 동화되어 간다.

환경은 우리를 조종하고, 우리는 자신만의 질서를 만들고 흐믓해한다.



삶은 질서 속에서 결과를 향해 달려가는 마라톤의 연속이다.

우리는 그 속에서 만족을 얻고, 즐거움을 얻으며 행복한 삶을 살아야 한다.

예술 키워드

* Techne
오늘날의 art란 말의 어원으로 고대에 쓰인 말이다.
당시에는 art와 의미상 똑같이 사용하지 않았다. 솜씨, 숙련된 제작을 뜻하며, 이성을 통하여, 경험을 통해 규칙과 법칙을 알아내는 것을 의미한다.
고대 그리스어로 공학의 어원이며, ars, art로 변하여 쓰이게 된다.

* Disegno
design의 어원을 가지는 것으로 계획의 뜻을 가진다.
르네상스 때 회화, 조각, 건축이 통합되는 단일 개념을 형성하면서 생겨났다.
알베르티는 건축론에서 "례술가의 머릿속에 있는 계획 혹은 고안"이라고 정의했고
바자리는 회화 조각 건축은 예술가가 정신 속의 관념을 손을 통해 표현 한다고 말했다.
쭈까리는 미술가들의 제작 행위를 신의 창조행위에 버금가는 활동이라고 말했다.

* Avant-Garde
앞서나간 부대(프랑스 군사용어)의 의미를 가지며, 전위 예술가를 지칭하는 것이다.
반항적인 예술가들의 무리를 의미하며, 관습, 가치, 전통에 관대하고, 새로운 양식을 추구한 급진적 경향의 예술 정신이다.

* Artes Liverales
고대에 techne에서 두가지로 나뉘는데 그중 자유술에 해당하는 학문을 말한다.
Artes Liverales : 자유술 - 육체적 노동이 없는 과목
Artes Vulgares : 범속술(천박함)

Artes Liverales 는 자연학, 논리학, 기하학, 수학 산술을 가르치는 학문이다.
중세에는 이것이 강화되어 자유 7학예로 발전되어 문법, 수사, 논리 3과 천문, 음악, 산술, 기하의 4과로 나누어 지게 된다.

* Musike
신의 영감을 받아 행하는 자유로운 창조행위

* Beaux-arts(fine-arts)
순수미술로서 응용미술(학문, 수공예)과는 상반되는 것이다.
순수예술은 문학, 음악, 무용으로 나누어진다.

* Contrapposto
고대 그리스의 조각상에서 자연스러운 포즈를 표현하기 위해 한쪽 다리를 구부리고 다른쪽 다리를 내밀고 있는 자세를 말한다.

* Katharsis
배설이란 의미에서 시작한 것으로 예술을 접하게 되면서 느끼는 극도의 희열을 뜻한다.

* Parody
원작을 희화화 한것을 말한다.
이 역시 포스트 모더니즘시대에 유행하는 한 예술의 한 형태이다.

* Kitsch
싸구려복제 장식품을 의미하며 복사된 그림작품을 뜻하는 말이다.
포스트 모더니즘 시대로 들어와 작품을 복제하여 대량생산한 작품을 말한다.

* Symmetria
아름자운 자연의 모방이란 말에서 측정을 뜻하는 용어

* Ekstasis
황홀경이라는 뜻으로 번역된다.
고도의 흥분된 상태를 의미한다. 탈아지경, 무아지경으로 말하기도 한다.

* Modernism / Post Modernism
모더니즘은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전반의 시대정신이다. 이성중심주의와 합리주의라는 근대적 정신에 근거하여 19세기 중반부터 형성되기 시작된 도시화, 산업화 된 사회에 등장한 과거 및 현재에 대한 진보적인 새로운 문화예술이다.

포스트 모더니즘은 모더니즘의 지적인 진지함, 즉 모더니즘의 사고방식과 문하ㅗ가 세워놓은 엄격한 지배의 틀을 거부하고 보다 절충적이고 대중적인 방식을 시도한 광범위한 문화 예술현상이다.

* Dionysos적 / Apollon적
디오니소스 적인 것은 밤을 상징하고 밤과 감성을 상징한다. 술이 등장한다.
아폴론적인 것은 낮, 명료성과 이성을 상징한다. 주로 화살, 악기, 음악이 등장한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공

이 작품은 낙원이 아니며 행복도 없는 ‘낙원구 행복동’을 배경으로 소외 계층을 대표하는 난장이 일가의 삶을 통해 도시 재개발 뒤에 숨은 소시민의 아픔을 그리고 있습니다. 이 작품의 주요 등장인물인 난장이네 가족은 재개발지역에서 가난하게 살고 있는 5명으로 구성된 가족이며, 작품의 전개는 3명의 자식의 시각에서 각자의 관점에서 가족이 처한 현실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1장에서는 큰 아들 영수가 주요 서술자로 등장하며, 내용의 주요 핵심 사건인 집의 철거 통지서를 받는 내용과 가족들의 삶의 역사를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영수는 다른 어린 동생들에 비해 정확하게 자기 가족의 가난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습니다. 선조부터 대대로 내려온 뿌리 깊은 가난과 그 가난 때문에 자신도 가난을 되 물림 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열심히 공부에 매진하고 있습니다.
2장에서의 주요 화자로 다루었던 둘째 영호는 영수에 비해 좀 더 객관적으로 가난이라는 것을 표현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이면에는 자신의 가족이 처한 현실이 왜 그런지 형에 비해 구체적으로 알고 있지는 못하지만, 아버지와 어머니를 곁에서 바라보며 자신의 가족의 가난에 대한 슬픔을 간접적으로 느끼고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이를 아버지와 어머니의 행동을 자신의 눈으로 묘사함으로서 느끼는 슬픔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3장에서의 영희는 여자의 몸으로서 가족을 위해 몸을 희생하면서까지 투기업자로부터 집의 소유권을 찾아오게 됩니다. 비합리적인 방법이긴 하지만, 가난의 대를 끊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저지르는 죄에 죄책감을 느끼지만, 결국은 꿈을 짓밝히게 된 아버지의 자살에 오열하는 영희의 모습에 오히려 더 측은하게 만들게 하는 만드는 요소가 되었다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각 장마다 세 명의 화자의 시각으로 바라본 한 가족이 집을 잃게 되는 이야기를 소설 전반에 걸쳐 서술하게 됩니다. 이러한 전개를 통해 현실에서 고통을 받는 위치에 있는 가족의 이야기를 알게 되는 과정에서 저는 무척이나 저의 마음을 아프게 했습니다. 그리고 그 화자들의 고통이 무엇일까 곰곰이 생각하게 되면서 진정으로 소설의 제목은 주인공들이 꿈꾸는 이상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의미라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난장이 가족의 가장인 아버지는 꿈이 있습니다. 남에게 천시를 받는 난장이로서, 부양해야 할 가족도 있으며, 몸도 많이 쇠약하여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었지만, 늘 책을 읽으며 우주로 쇠공을 타고 우주로 날아가겠다는 꿈을 꾸고 있습니다. 아들이 자신의 꿈 이야기를 듣고 무시하지만 그는 오히려 사람은 꿈을 가져야 한다고 야단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그의 쇠공이야기는 그의 못다 이룬 꿈인 써커스의 주인공을 꿈꾸는 것과 같은 맥락에서 생각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가 입으로 항상 말하는 우주는 멋진 관객들로 둘러싸인 써커스 장이며, 가장은 현실과 동떨어진 반면 가족들은 그러한 이상에 반대합니다. 이상에 집착했던 아버지는 결국 집을 잃자 곧 자살로서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꿈을 꾸는 가난한 자에게 결국 꿈을 빼앗은 건 꿈이 없는 자들의 포기이기도 하고, 근본적으로는 그 꿈을 가진 자들의 이익을 위한 탐욕이었던 것입니다.
이 작품은 오늘날을 살아가는 모든 소시민들이 잘 안다고 생각했던 소외계층의 아픔을 너무나 사실적으로 그려내고 있었습니다. 특히나 저에게 공감을 일으키는 부분이 몇 구절 있었는데, 특히 ‘천국에 사는 사람은 지옥을 생각할 필요가 없다. 그러난 우리 다섯 식구는 지옥에서 살면서 천국을 생각했다.’ 작품의 도입부에 나오는 영수의 생각으로, 가난한 자의 서러움을 모르는 자는 그들의 서러움을 모르며, 가난한 자들은 항상 부자가 되고 싶다는 꿈을 꾸고 산다는 것을 아주 잘 표현한 구절입니다. 이는 도시빈민의 궁핍한 생활, 그리고 자본주의의 모순에 찬 구조 속에서 노동자의 현실적 패배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작품에서 드러난 문제는 우리사회가 당면한 엄연한 현실적 문제이자 풀어야 할 과제인 것입니다. 또한, ‘아버지를 난장이라 부르는 악당은 죽여 버려.’ 라고 생각하는 자식의 마음에 너무나도 처량하고 가엽기까지 했습니다. 이들이 겨우 난장이의 자식으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이렇게 고통 받고 학대받아야 하는가? 전 그러한 현실을 실감나게 그들의 마음과 눈으로 표현한 이 작품의 묘사에 찬사를 보낼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 작품은 있는 자와 없는 자간의 괴리를 너무나도 잘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세상은 공부를 한 자와 못한 자로 너무나 엄격하게 나뉘어져 있었습니다.’란 글귀에서와 같이 얼마나 이 세상은 불공평한지 그리고 배운 자들은 곧 부자들이라고 생각이 되었습니다. 전 어렸을 때 나는 마냥 사회가 공평하다고 보았고, 가난한 사람들은 옛날이야기에서와 같이 게으르기 때문에 가난하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렇게 때문에 그런 사람들이 불쌍하지만 자기가 자초한 일이어서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 책을 읽으면서, 그리고 저 나름대로 세상을 살면서 저 스스로도 부자는 아니었기에 세상이 불공평하다는 것 알 수 있었습니다. 영수의 말대로 ‘세상은 학교 안에서 배운 것과는 정반대로 움직였습니다.’란 구절과 같이 TV에서나 보던 가난한 사람들의 모습은 엄연한 현실이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들의 가난은 그들의 게으름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부모가, 또 그들의 부모의 부모가 가난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여유가 있는 자들은 그들의 행복을 빼앗아 대신 행복을 누리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내 주변의 모든 것에 대하여 감사하고 내가 얼마나 행복한 삶을 살고 있는지 깨달았습니다. 저는 그동안 세상에 너무 무관심했던 것 같습니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 저에게 준 충격은 말로 표현을 할 수 없을 정도로 큰 충격이었지만 한 가지 좌우명을 가슴 속 깊이 아로새기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래! 그들을 외면해서는 안된다. 내가 받은 만큼 나보다 못한 사람들에게 베푸는 삶을 살자!’ 라고..
사실 이 작품에 담겨 있는 소외된 도시 근로자의 여러 문제는 우리 사회가 당면하고 있는 현실의 문제입니다. 즉, 생존에 필요한 최저 수준에도 못 미치는 저임금, 열악한 작업환경, 고용자로부터 강요되는 부당한 노동행위, 노동조합에의 탄압, 폭력으로 저항할 수 밖에 없는 그들의 마음, 그리고 가진 자들의 위선과 사치, 그들의 교묘한 억압방법 등 산업 사회의 부정적 측면들이 제시되어 있습니다.
오늘날은 빈민가가 많이 줄었다고 생각하는 대도시 서울에서도 재개발 후 자신의 집터를 헐값에 팔리는 것을 반대하는 입주민들의 거센 저항으로 많은 목숨을 잃은 뉴스를 여전히 접할 수 있습니다. 그들과 이 소설의 주인공이 다른 점이 거의 없을 정도로, 그들이 처한 환경은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점점 더욱 개인적인 삶을 중요시하는 도시사회에서, 남이 무엇을 하던 신경 안 쓰는 경향이 강해졌고, 이전 사회보다 더 각박해진 것이 현실입니다. 삶을 살아가는 모습은 다양하지만,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란 소설의 주인공들은 이 세상 그리고 앞으로도 다른 형태로 나타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린 그 소외계층에 대해 한번 쯤 더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얼마 전 철거민들이 경찰 탄압에 반대하여 저항을 하다가 큰 불로 목숨을 잃었고, 이들의 분향소를 찾은 이 작품의 작가 조세희 씨께서 이렇게 말을 했다고 합니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 출간된 지 30년이 지났는데 같은 일이 반복이 되고 있어, 그런데 그 방법은 더 야만적이고 더 미개해지고 더 끔찍해진 것 같아.” “소설 속의 난장이는 강제철거를 당한 후 삶의 희망을 빼앗긴 채 굴뚝 속에서 자살을 했고 2009년 용산의 세입자들은 옥상에서 철거에 저항 하다 불에 타죽었습니다” 우리는 아직도 우리 주변에 살고 있는 못난 난장이들이 쏘아올린 작은 공을 보지 못하고 살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다시금 희망을 가지고 살고 있는 가난하고 못난 사람들에게 조금이나마 관심을 가지고 살아야겠다고 느꼈습니다.

리틀 빅 히어로

영화는 솔직히 배우 때문에 보게 된 영화입니다. 제목에서부터 풍겨오는 이미지는 험난한 여정을 떠나는 판타지에 어드벤쳐 느낌이 들지만, 현대판 왕자와 거지와 같은 스토리 구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스토리가 전개되면서, 짜임새 있는 스토리와 뻔하지만 의미있는 소재는 영화가 주는 것이 배우가 아닌 영화 자체로 저에게 다가왔던 기억이 납니다. 그 덕에 전 영화를 3~4번씩 다시 봤던 기억이 나네요.이 작품은 내게 더스틴 호프만의 연기가 얼마나 대단한지 그리고 영화 전반적으로 흐르는 언론의 위력이 어떤 것인지 잘 느낄 수 있게 해준 작품이었습니다. 이 영화의 줄거리는 그다지 복잡하진 않습니다. 동화로 따지자면 왕자와 거지와 비슷하기도 하고, 때로는 구두를 찾는 신데렐라와 비슷하죠. 언론의 허구성과 광범위한 전달성을 통해 진짜 주인공이 아닌 다른 사람이 영웅으로 만들어져 버리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 영화의 비운의 주인공인 버니 역의 더스틴 호프만은 가족들에게 버림받고 이혼 당해 혼자 살고 있는 인물입니다. 그는 가정에서는 아무 것도 책임지지 못하는 무능력한 가장이고 사회에서는 소매치기 장물 거래를 하면서 하루 하루를 살아가는 범죄자로서 장물아비며 좀도둑입니다. 그는 자신을 법정에서 변호해준 국선 변호사의 지갑을 소매치기 할 정도로 좀 특이하고 뻔뻔한 성격의 인물로 나옵니다.이따금씩 자신의 아들을 만나 우스꽝스러운 자신의 생활 신조를 떠벌리며 자신처럼 따르라고 가르치려고 하죠. 그의 하는 언행을 통해 그의 생활 신조를 면면히 알 수 있는데 그가 말하는 자신의 자랑스러운 생활 신조는 험난한 정글과 같은 이 세상에선 조용히 살아야 한다 입니다. 그는 진정 이세상에 살아가는 수많은 일반 사람들처럼 복잡한 것은 피하고 단지 피해만 보지 않고 살아가는 평범한 인물의 표본인 것입니다.어느 비 오는 날, 아들과 영화를 보기 위해 집에 가던 버니는 뜻밖의 비행기 사고를 현장을 만나게 됩니다. 어느 소년과 약속을 한 버니는 그 아이의 아버지를 구하기 위해서 불타는 비행기 안으로 들어가고 본의 아니게 많은 사람들을 구하게 됩니다. 이 때 여기자인 게일(지나 데이비스) 을 구해주면서 이야기는 꼬이게 됩니다. 그녀는 밤중 폭발의 사고 현장에서 버니를 알아보지 못했고, 단지 그는 구두 한 짝만을 사고 현장에 남겨둔 체 사라져 버립니다. 하지만 그런 엄청난 일을 했지만 버니는 그저 태연한 듯 자신이 구두를 잃어버린 것만을 원망할 뿐입니다.버니는 우연히 길에서 얻어 탄 존이란 거지의 트럭에서 자신이 했었던 비행기 사고현장에서의 무용담을 존에게 늘어놓았고, 그때 잃어버린 구두 한 짝에 대한 불평을 존에게 말해주곤 자신의 한 짝의 구두를 그만 차에 남겨두고 가버리게 됩니다.사고 이후 구출 된 게일은 tv 특종기사로 만들기 위해 비행기 폭발의 위험을 무릎 쓰고 수 많은 사람들을 구해낸 영웅을 찾기 위해 tv라는 매체를 이용합니다.이때부터 게일은 뉴스의 언론 이용하여 영웅 부풀리기에 앞장서게 됩니다. 그 이후로 영웅의 이야기는 점점 커지고 사태는 엄청나게 커지게 됩니다. 급기야 영웅에게는 엄청난 현상금이 걸리게 되었고, 영웅 찾기 보도에 대한 사람들에게 점점 호기심을 유발하게 만들었고 조금씩 확대 과장되어 영웅 아닌 영웅을 만들고야 말았습니다. 급기야는 얼굴 없는 주인공은 국민적인 영웅으로 부상하게 되고 맙니다.이 때 거지 존은 버니가 두고 간 구두 한 짝과 버니가 했던 말을 이용해 자신이 영웅이었다라고 나서게 됩니다. 그리하여 그는 순식간에 국민적인 영웅의 주인공으로 부상하게 되었으며 이때부터 존은 고아원, 병원, 양로원 등의 외로움과 고통 받는 이들과의 만남을 시작하게 됩니다. 존은 자신이 한 일도 아니었으며 천성이 착해서였는지 자신의 한 일을 낮추려고 하지만 주위 사람들은 그런 그에게 겸손한 마음을 배우게 되고 더욱 그를 신뢰하게 됩니다.그의 영웅적인 행동에 귀감이 되었던 모든 사람들은 그의 부드러운 말씨와 희망이 담긴 조언에 새 희망을 찾게 되었고 꺼져가는 생명을 되살아나게 하는 기적적인 장면을 만들어내게 하기도 합니다. 그는 비행기 사고 이후보다 더 영웅이 되어 가게 되버립니다. 하지만 이때 정작 주인공이 되어야 할 버니는 사고 때 얻은 게일의 신용카드를 불법으로 팔려 하다가 감옥까지 가게 됩니다.버니는 감옥에서 우연히 보게 된 존의 뉴스를 통해 자신이 존의 자리에 있어야 할 주인공이란 것을 알게 되고, 존에게 찾아가 돈을 뜯어낼 궁리를 하게 됩니다.버니는 자신의 진실을 증명하기에 너무 두터워진 존의 위상에 어쩔 수가 없었지만 그런 와중에 때마침 존이 자신의 양심의 가책을 못 이겨 투신 자살을 시도하게 됩니다.버니는 위험을 무릅쓰고 존에게 다가가 설득을 시도하게 됩니다.버니는 생각을 바꿔 그 자신이 영웅이 되기엔 부족하며 존의 선행에 진실한 영웅이라고 말해줍니다. 그는 단지 자신에게 금전적인 보상만을 바라며 진실을 절대로 말하지 않겠다고 약속합니다.저는 이 장면에서 버니가 제시한 존과의 거래가 특유의 버니 적인 이득을 챙기는 수법이기도 했지만, 단지 순간을 모면하기 위한 뻔지르르한 말보다 그만의 절묘한 해법이 아니었다 생각합니다.존은 그 협상에 응하여 자살을 포기하고 영웅으로 돌아오려고 하지만 이때 버니는 그만 자신의 실수로 높은 건물의 벽에 매달리게 되었고 존은 그런 버니를 구해내어 다시 한번 영웅으로 거듭하게 됩니다. 버니가 죽으면 모든 비밀이 지켜질 것임에도 존은 그런 버니를 구해내고야 맙니다.마지막 장면에서 기자들과의 인터뷰 도중, 존은 이렇게 말합니다. 어느 순간에 사람들은 자신의 영웅적 자질을 발휘하게 된다. 그때 매스컴은 한 순간에 그 사람을 영웅을 만들어 낼 수 있다. "사람들은 누구나 영웅이 될 수 있다" 라고...
분명 영화에서의 여기자 게일은 거대 미디어를 통해 이익을 노리는 사람입니다. 미디어는 그러한 사람을 이용해 이익추구를 선도하는 과정에서 진실을 왜곡하고 가릴 수 있습니다. 돈과 매스미디어는 지구 상에서 어떠한 권력보다 큰 힘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리틀 빅 히어로란 영화는 그런 매스미디어의 위력적인 힘을 한 인물이 영웅화 되는 과정을 통해서 여실히 현실감 있게 보여 주었습니다.이 영화에선 존이 방송의 영웅화 전략을 통해서 국민적 영웅으로 부상하게 됩니다. 또, 그런 와중에 뜻하지 않게 존은 선행을 하게 되었고 생명을 잃어가던 한 소년이 살아나기도 하죠. 이는 어떻게 보면 미디어의 좋은 점으로 보이기도 하겠지만, 이는 근본적인 일은 아닐 것입니다.무분별하게 미디어를 활용하여 그저 자기 배만 불리는 사람들은 문제라고 봅니다. 광고주의 인기를 얻기 위해 프로그램에 지나칠 정도로 폭력성이나 선정성을 강조하고, 허위 사실을 보도하는 등의 일은 돈만을 추구하는 영화의 게일과 같은 기자는 자신으로 인해 많은 사람이 나쁜 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무자비한 미디어의 전략에 사람들은 그저 무비판적인 수용자가 되어버립니다. 존이 그저 국민적인 영웅으로 부각되면서 어느 누구도 그가 영웅이 아닐 수 있다 란 생각을 하지 못하듯이 말입니다. 버니가 자신이 사람들을 구해내었다고 말하려고 해도 단지 사람들은 사람을 구해낸 영웅으로서는 잊어버리고 주위 사람들이 우상으로 여기는 영웅으로서의 존재로 생각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존 처럼 착한 마음으로 미디어를 이용해 좀 더 나은 세상으로 이끌 진정한 영웅들이 이 세상에 많아질 것이라 기대를 해봅니다.

우리나라의 다문화사회 진입과 국민의식

정치 문화적 배경
전 지구화와 함께 진행된 국제 이주의 물결은 한국사회의 인적구성에서 급격한 변화를 가져왔다. 다문화가정은 80년대 후반부터 국내 노동시장에 유입된 외국인 이주근로자들과 90년대에 늘어난 국제결혼가정의 이주여성들과 그 가정의 자녀 등을 총칭하는 유행어가 되었다. 다문화가정이 정착한지 20년이 지났지만 우리사회는 이들에게 자리를 내주는 데 주저하고 있다. 이는 순혈주의적 단일민족주의로 인해 이주민을 배제하며 차별하는 근본적 문제에서 찾을 수 있다. “단군의 자손”이라는 인식이 “우리는 한 핏줄”이라는 인식의 원인이고 이러한 혈통 중심의 사고가 우리 현대 사회에서 다문화가정을 이해하는데 장벽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것이다.[1] 우리나라의 다문화 가정은 인구의 2%인 100만 명을 넘고 있다. 한국의 주요 다문화가정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결혼이민자의 문제는 한국사회에서 해결과제의 1순위가 되었다[2]. 이제는 다양한 인종과 공존하는 길을 모색하여야 한다. 한국의 사고방식과 문화를 강요하는 일방적인 커뮤니케이션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으며, 조화로운 다인종 다민족 시대를 위한 다문화 주의를 받아들어야 할 시점에 이른 것이다.[3]

우리나라의 현실
다 문화 가정의 아이는 취학을 하면서 언어와 외모의 차이로 또래 친구로부터 따돌림을 받고 있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혼혈인을 한국인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대부분의 다문화 가정의 자녀들은 또래 친구들 틈에서 정서적인 불안을 안고 살며, 언어적, 문화적인 혼란으로 학습장애까지 안고 살고 있다. 또한 국가의 외국인에 대한 차별적 제도는 우리사회에서 다문화를 수용하는데 많은 갈등을 만들고 있다. 현재 우리나라 2퍼센트의 구성비를 가지고 있는 다문화 가정은 2050년에 17퍼센트에 육박할 것이라고 전망하므로 앞으로 한국사회가 외국인과 공존을 선택하지 않을 경우 큰 문제가 발생할 것이다. 다문화 가정은 한국문화와 이질적이지만 한국 문화를 풍성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미국이 발전할 수 있던 경제적 원동력은 결국 이민자들의 유입에서 온 것이라는 통계에서도 알 수 있듯이 국가의 다문화 환경은 국제경쟁력으로 이어질 수 있다. 성숙한 다문화 환경을 조성하고 다문화를 국가의 경쟁력으로 이용하는 자세가 필요한 것이다. 다문화 가정 아이도 역시 우리의 한국의 미래이다. 그들을 받아들이고 따스하게 바라보는 시각이 필요한 시점이다.

나가야할 방향
세 계화를 향하는 이 시점에, 우리는 세계 속의 한국이 어떻게 변화되어야 하는지를 인식해야 한다. 아무리 세계경쟁력을 외쳐도 정작 안에서는 다양한 문화를 배척하는 이중적인 모습을 보이는 것이다[4]. 근본적인 문제는 우리나라 국민의 인식이다. 한국인들의 혼혈에 대한 사고방식과 역사에서 이어져 내려온 외국인에 대한 적대적 감정의 뿌리는 남아있다는 것이다.[5]. 다문화 가정에 대한 인식을 전환할 수 있는 미디어, 정책, 사회운동의 전개가 앞으로 지속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참고문헌
1. 한경구&한건수. 2007. "한국적 다문화 사회의 이상과 현실", 한국사회학회 동북아시대위원회 용역과제 : p86
2. 김이선. 2007. "다민족ㆍ다문화사회를 향한 길 위에 선 한국사회를 진단한다." 젠더리뷰 Vol.5 : p112
3. 홍숙영. 2007. "외국인에 관한 TV 담론과 다문화주의", 프랑스문화예술연구 9권 4호 (제22집) : p282
4. 강진구. 2009. "수기(手記)를 통해 본 한국사회의 혼혈인 인식". 우리文學硏究 제26집 : p157
5. 이태정. 2005. "외국인 이주 노동자의 사회적 배제 연구". 사회연구 2005년 제2호 : p144

문학이란 무엇인가?


문학의 정의

문 학은 어떤 역할을 하는가? 이 질문은 ‘문학이 무엇인가’라는 질문과 같이 매우 중요하고 절실한 문제이다. 언뜻 보면 두 질문이 다른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아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문학의 기능은 문학의 본질에서 오는 것이고, 문학의 본질을 통해 문학의 기능을 이루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먼저 문학의 정의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자. 이 질문의 답을 하려면 우리의 삶을 먼저 돌아봐야 한다. 문득 생각해보면 문학은 책장, TV, 신문 등 우리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것이지만 이것을 한마디로 정의내리긴 쉽지 않은 것 같다. 문학을 정의내리는 것 자체가 문학의 영역을 한정 짓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학도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인식하는 개념이 있을 것이므로 문학의 정의를 사전적으로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문학(文學)은 언어를 예술적 표현의 제재로 삼아 새로운 의미를 창출하여, 인간과 사회를 진실 되게 묘사하는 예술이다.[1]

문학은 사상, 감정 및 취미를 통한 사상의 기록된 표현이다. 더욱이 그것은 일반인에게 쉽고 흥미로운 비전문적 형식으로 표현된 것이다(헌트)


정 의를 통해, 문학은 인간의 경험과 표현하고자 하는 생각을 언어라는 도구를 사용하여 보편적인 사상 · 감정 · 취미 등을 표현하는 일, 그리고 그것을 표현하는 대상 체를 일컫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문학은 언어 예술에 속하며 표현방식은 주로 문자를 사용한다. 문학은 작가의 관점에 따라 써지며, 작가가 느끼는 동시대의 세태를 반영하기 때문에 시대에 따라 성향이 변하게 된다. 해당 시기의 작품을 통해 그 시기의 특징을 문학을 통해서 알 수 있다.


문학의 기원

문 학의 기원은 크게 3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 번째, 모방본능설이다. 인간은 모방을 하려는 본능가지고 있다. 플라톤은 일찍이 세상에는 이데아라는 절대적 아름다움의 세계가 있다고 했다. 그리고 인간은 이데아라는 절대적인 아름다움의 세계를 모방한다고 믿었다. 고대에는 모방이란 개념을 미메시스라는 인간본성의 하나로 표현하기도 했으며, 그러한 원초적인 본성에서 문학이 탄생되었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유희본능설이다. 18세기 낭만주의의 태동과 철학자 칸트에 의해 제기된 것으로 인간의 순수 이성으로는 표현이 불가능한 것이 있다는 전제하에, 문학은 인간의 유희적 본능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로서 타인과 교감을 나누기 위해 유희적 행위를 한다. 문학은 이러한 본능의 표현인 것이다. 세 번째는 실용도구유래설이다. 이는 문학이 자연적으로 발생이 되었다는 것을 부정하고 예술이 삶과 관련된 실용성에서 시작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오랜 옛날 제의를 위해서 신에게 추었던 춤에서 음악과 그림이 나왔다고 믿는 관점과 같이 문학도 인간의 삶의 일부에서 목적에 의해 탄생했다는 것이다.


문학의 형태

문 학의 형태를 구별 짓는 용어로 ‘장르’라는 단어가 있다. ‘장르’는 종류, 유형을 가리키는 라틴어 genus, generis에서 유래한 것으로 문학의 갈래를 뜻하며 오늘날 흔히 음악이나 예술, 문학에서 스타일을 정의하기위해 주로 쓰이는 말이다. 전통적으로 문학의 장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분류방법이 통용되는데 시, 소설, 희곡으로 구별되어진다.[2] 시는 운문이 있는 글로서 운율과 행과 단락을 가진 요약된 형태의 글로서 형식에 짧은 글을 담아 표현하는 것을 말한다. 소설은 산문의 일종으로, 허구적 장치를 사용하여 구성된 이야기를 말하는 것이다[3]. 대체적으로 소설은 형식에 제한은 없으며, 분량 역시 제한이 없다. 희곡은 연극을 위하여 만들어진 것으로서, 대사를 중심으로 인물의 동작이나 무대효과를 첨가하여 문자로 표현한 것을 말한다.[4] 최근에는 희곡의 다른 장르인 영화대본과 같은 시나리오도 문학에 포함되는 추세이기도 하다. 문학은 각 타입에 따라 여러 장르로 구분이 되지만, 내용의 일관성을 유지하고 그 표현 형식만 바꾸어준다면, 얼마든지 다른 장르로 변화시킬 수 있다. 다시 말해서, 같은 주제의 문학이라 하더라고 표현하는 방법을 다르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시로 작성된 글을 소설로 풀어쓸 수 있고, 소설을 희곡으로 쓸 수도 있는 것이다.

오 늘날, 통신 매체의 급속한 발달은 문학에도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문학이 가지고 있었던 종이와 책, 펜이라는 틀을 벗어나 컴퓨터로 쉽게 작품을 쓸 수 있고, 인터넷에 올려 시간과 장소에 구애 없이 언제 어디서건 글을 사람들에게 보여줄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처럼 일반인들이 쉽고 빠르게 문학에 접할 수 있게 되다보니 다양한 실험을 통해 다소 파격인 형식을 가지기도 한다. 특히, 인터넷 소설은 파격적인 소재와 장르의 파괴를 시도함으로서 현대 문학의 특징으로 자리 잡고 있다.


문학의 두 가지 기능

문 학을 역할을 기준으로 나눈다면 크게, 교시적 기능과 쾌락적 기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교시적 기능이란, 문학을 통해 독자들이 새로운 시각을 가지고, 주위의 사물을 새로운 차원으로 볼 수 있거나 자신의 내적 성찰을 가능하게 하는 것을 말한다. 문학은 이상의 문제 뿐 아니라 현실의 문제를 끄집어내어 표현함으로서 독자에게 알리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정권에 비판을 하거나 현실세태를 비판하면서 좀 더 나은 세상을 바라는 마음을 작품에 담은 것이 예가 될 것이다. 또한, 일기의 형식으로 자신의 마음을 솔직하게 담는 작품의 경우, 작가의 마음을 드러냄을 통해 독자에게 삶의 느낌과 작가의 마음을 전달할 수도 있다.

또 한, 문학은 쾌락적 기능도 가지고 있다. 쾌락적 기능은 독자가 작품을 읽으면서 내용에 감동을 느끼면서 느끼게 되는 카타르시스를 말한다. 쾌락적 기능을 통하여 독자는 글을 읽으면서 작품 속의 인물이 겪는 경험을 대리할 수 있고, 그에게 공감을 느끼며 즐거움을 맛볼 수 있다. 쾌락적 측면에서의 문학의 기능을 사상가들은 아래 같이 정의 내렸다.

문학은 정화된 쾌락의 모든 근원 중에서 가장 뛰어난 것이다(헉슬리)

문학이란 산문이건 운문이건 반성보다는 상상의 결과요, 교훈이나 실제적 효과보다는 될 수 있는 한 많은 국민에게 쾌락을 줌을 목적으로 하고, 특수한 지식이 아니라 일반적 지식에 호소하는 저술로 이루어진 것이다(포스넷)


이 글에서 다루고 있는 문학의 사회적인 기능은 교시적 기능의 한 갈래로서 문학을 통해 작품이 표현한 그 당시의 현실을 이해하고, 작가가 표현하고자 하는 사회적 메시지를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허구로서의 문학

앞 서 이야기한 문학의 기능은 현실을 반영하는 교시적 기능이 있다고 했다. 하지만 그 문학이 사실을 있는 그대로 옮기는 것이 가치가 있는가에 대해서는 생각을 해볼 필요가 있다. 문학이 실생활의 그대로의 모사만 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면, 그것을 제시하는 아무런 의의가 없다. 있는 그대로를 보여 주는 사진도 구도라는 것이 있고, 또 특별히 의의 있는 순간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 보통이다. 문학은 있는 그대로의 사회 모습을 다 옮길 수는 없다. 즉 글로 전달할 내용을 취사선택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실제 사회의 모습을 다르게 묘사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사진은 의의 깊은 순간을 포착한 것이지만, 문학도 인생의 여러 모습 중에서 작가가 특히 의미 있는 부분을 선택한 것이기 때문에, 작가의 인생관이 반영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점은 실사회를 모델로 해서 실사회에 아주 접근하는 것이라 해도, 그것은 허구라는 것이다. 허구, 즉 꾸며진 이야기는 작가의 의도에 따라서 실생활과 아주 비슷하게 꾸며질 수도 있고, 아주 다르게 환상적으로 꾸며 질수도 있다. 엄격한 의미에 있어서 작가는 시시각각으로 자꾸만 변모하는 사회를 사진사처럼 그 어느 순간에 포착하여 바로 그 장면만을 영구히 보존하려는 것이 아니라, 변하는 사회생활 속에서 변하지 않은 인간의 본성, 인간의 사실을 붙잡으려는 것이다.[5]


사회적 기능으로서의 문학

문 학의 기능은 문학의 본질이 무엇인가 하고 인식하는 데서 나온다고 할 수 있다. ‘문학의 사회적 기능이 무엇인가’를 묻는다면 그것은 문학의 본질은 무엇이고 이것이 ‘오늘 날의 사회에서 문학은 어떠한 역할을 하는 가’하는 질문과 직결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6]. 문학의 기능적 측면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문학은 교시적 기능을 가지고 있다. 신화, 미래적 상상과 같은 비 사실적인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것을 제외하자면 문학은 일반적으로 시대를 반영한다. 문학은 인간의 삶을 다루기 때문에 그 시대의 사회․문화적 현상과 밀접한 관련을 맺게 된다. 때로는 그 시대의 사회․문화 풍속이 그려지기도 하고, 그 시대의 사회 구성원들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 사회․문화의 미래상이 제시되기도 한다.

우 리나라 문학을 예로 들어 살펴보면, 1970년부터 시작된 군사정권의 독재는 현실비판적인 작가들을 양산했고, 실제로 당시엔 저항적인 문학이 주를 이루게 되었다. 당시의 사회는 정부로부터 표현의 자유에 억압을 받던 시절이라 함부로 비판적인 글을 쓸 수가 없었다. 당시에는 소설보다는 시가 많았는데 그 이유는 짧은 글과 중의적 단어를 사용하여 자신의 생각을 시로 표현을 하였다. 대표적인 작가로 김지하, 박노해가 있으며, 시를 통해 국민의 억압을 고발하고, 감정을 표현했다. 그들의 작품을 통해 국민은 힘을 합쳐 단결을 하였던 것이다.

80 년대에는 한국의 급속한 경제발전에 따라 소외계층이 늘어났고, 돈으로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물질만능주의의 세태가 만연함에 따라 현실을 고발하는 작품이 많이 등장하게 된다. 대표적인 작품으로 조세희작『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 있다. 가난한 달동네 사람들이 재개발을 통해 내쫓겨나는 현실을 보여주는 이 작품으로, 큰 반향을 일으킨 베스트셀러이다. 이 작품을 통해 독자는 가난한 자들의 아픔을 이해하게 되었고, 사회운동을 촉발시킨 계기로 작용하게 되었다[7].

또 한, 80년대에는 시의 흐름이 저항 시에서 탈피하여 당시 신주류였던 모더니즘의 형태로 변화하게 되었는데, 새롭게 부각한 산업사회의 배경에서 새로운 창조적 가능성과 실험 정신을 보여준 시인이 많이 나오게 되었다. 장정일과 황지우가 대표적인 작가들로, 이들의 시에는 ‘나는 누구인가’, ’세계의 본질은 무엇인가?‘, ’가치있는 삶은 무엇인가?‘와 같은 인식론적인 회의를 바탕으로 문명의 세속화에 저항하는 부정의 정신을 잘 구현했다. 이들은 문학의 정체성에 대한 도전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이후 문학에 많은 영향을 끼치게 된다[8].

90 년대에는 이후의 문학은 우리 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새로운 사회 ․ 문화 현상들을 문학 작품 속에 담아내고 있다. 또한, 현대의 다양한 사회 ․ 문화 사조가 문학 속에 표출되고 있다. 또한 컴퓨터나 인터넷의 도움으로 사회적 영향력이 확대되고 있는 디지털 문명, 과학 기술의 발전과 접목된 다양한 영상 매체 환경 등은 문학의 수용과 창작에 영향을 미칠 뿐만 아니라, 문학의 내용과 형식에도 큰 변화를 불러일으켰다. 작가와 독자의 소통이 빠르고 쉽게 이루어지면서, 즉각적인 유행의 반영이 이루어지고, 거침없는 현실의 표현이 가능해진 것이다. 이 시기에 문학은 대체로 가볍지만 흥미 있는 작품, 난해하지만 표현의 자유가 있는 작품들이 많이 나오게 된다. 김영하 작가와 같은 인터넷소설가는 다양한 소재와 풍부한 표현력으로 대중과 가깝게 소통을 하면서 현대의 대표적인 문학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문학의 역할

문 학의 역할을 한 두 마디로 정의하고자 하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오늘날의 한국사회의 문학의 역할이 영상이나 인터넷 시대가 돼도 소설의 본질적인 역할은 계속되어야 한다. 오히려 영상분야의 영역이 넓어짐으로 해서, 방송과 같은 대중적인 매체가 사회적 발언과 계도성 목소리를 높이기에 사회에 목소리를 높여야 한다는 것에 부담을 덜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문학은 다른 매체가 할 수 없는 부분을 써야 하며 많은 상상력과 기법적 실험들을 선보여야 할 것이다. 문학은 가장 커다란 기능으로 사회를 반영한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즉 문학작품의 부수적 기능이기는 하지만 문학의 사회적 기능은 조선시대 문학을 통해 그 시대를 반추할 수 있듯, 문학은 현 시대상을 반영함으로 인해 역사적 기록의 매체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또한 사회 비판의 기능을 통하여 위정자나 혹은 잘못된 시대 풍조 등을 비판하고 선도하는 기능도 가지고 있다. 또한 사회참여 적인 성격이 없는 문학조차도 사람들에게 감동이라는 방법을 통하여 자기정화, 즉 카타르시스를 이룬다. 문학은 사회가 올바르지 않을 경우 사회를 계몽 선도하는 역할을 하기도 하며 그 반대의 경우 올바른 방향으로의 사회의 질주를 가속시키기도 한다.[9]

문 학은 시대를 같이 흘러오면서 독자와 호흡을 하면서 우리의 삶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흔히 문학을 한 시대의 사회 · 문화의 나침반이라고 하는 것처럼 문학은 시대를 말해준다. 이러한 문학의 사회적인 기능은 독자 그리고 현대를 살아가는 국민들에게 많은 시사점을 제시해준다. 문학을 통해 민주주의의 정신을 살리고, 문학을 통해 우리네 삶을 조명하며, 이웃의 아픔을 느낄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우 리가 문학을 접하면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는 것은 문학이 그 사회 ․ 문화의 경향을 민감하게 비추는 거울이자, 그 사회 ․ 문화가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는 선도적 역할을 담당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문학 활동을 통해 사회 ․ 문화적 현상을 폭넓게 분석하고 비판하고, 또한 우리 사회와 문화의 다양한 이슈들을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런 활동은 문학 문화의 발전은 물론, 개인과 공동체의 발전에 밑거름이 될 것이다.



- 참고자료 -

1. 조남현, 2003. 고등학교 문학(상), 중앙교육진흥연구소. p12~15

2. 수업자료

3. 익명. 2009. “소설”. 위키 백과사전. http://ko.wikipedia.org

4. 익명. 2009. “희곡”. 위키 백과사전. http://ko.wikipedia.org

5. 이상섭. 1972.『문학의 이해』서문문고

6. 르네웰렉오스틴 워렌. 1993.『문학의 원리』이경수 역. 문예출판사

7. 조세희. 1993.『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문학과 지성사

8. 이연승. 2007.『장정일과 황지우 시에 나타난 유희적 해체의 양식에 대한 연구』비평문학 제25호 : p292

9. 익명, 2007. 『김영하 인터뷰모음』http://lovelywing.springnote.com/pages/600818

리처드 세넷 저. 유병선 역, 2009, 『뉴캐피털리즘』위즈덤하우스

뉴케피털리즘(New Capitalism, 2009)

저자소개
1943년 시카고 출생, 런던정경대 사회학과 교수로, 도시의 현대인의 삶과 도시화 연구의 권위자로 잘 알려져 있다. 2006년 독일 슈투트가르츠 시 주관의 헤겔 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각종 사회학, 예술과학 기관의 회원이며, New York Institute for the Humanities를 설립하기도 하였다. 사회학자인 사스키아사센과 결혼했다.[1]


저서위치
이 책에는 많은 예와 인용문이 등장하지만 특히, 이전의 사회적 구조를 표현하기 위해 맑스의 자본론과 베버의 저서(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와 사상(관료제)을 이용한다. 또한, 사회적변화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MP3플레이어에 빗댄 관념적 표현을 사용하고, 니체의 사상을 인용하였다.

내용요약
자본주의는 오늘날의 생산방식을 결정짓는다. 사회변화를 따라 각종 거대한 제도가 조각조각 해체되어버렸지만 사람들의 삶은 공동체보다는 해체된 제도의 파편 속에 갇혀 산다. 이 책은 신자본주의 시대를 맞아 전통적인 관료제의 변화를 시작으로 변화된 사회, 그리고 그 속에서 개인이 느끼는 공포와 가져야 할 자질을 잘 설명해주고 있다. 맑스가 활동한 시기에는 자본주의는 매우 불안정했다. 그는 ‘견고한 모든 것은 대기 속으로 사라진다’라는 말로 현재의 모든 불안한 요소들도 인간이 냉정을 찾으면서 모두 사라질 것이라고 했다.[2]. 사회는 자본주의를 바탕으로 변화되더니 과학과 통신의 발달로 세계화가 이루어졌다. 이제는 초우량 세계기업이 국가 경제를 결정하며, 국가 간의 교류와 회사와 근로자간의 교환관계보다 회사 간의 자본이동이 더 중요한 경제의 세계화 시대가 된 것이다. 베버가 말했던 안정된 관료제라는 개념은 국가나 회사체제에서도 찾아보기 힘들다. 대신 유연성이라는 명목 하에 비정규직의 대량 양산과 부서간의 쉬운 이동과 높은 이직율과 쉬운 퇴출이 오늘날의 대세가 된 것이다. 우리는 신자본주의를 맞이하고 있다. 변화된 자본주의 앞에 중산층들은 소유와 기회의 불평등을 가지게 된다. 이와 같은 시대에는 각 조직에 근로자들이 충성도가 저하되고 신뢰가 사라지며, 조직이 와해되기도 한다. 길게 보는 시각보다는 단기성과에 치우쳐 프로테스탄트 윤리라 일컬어지는 관념도 없어지고 만다. 한 가지 일에 꾸준히 일해 왔던 전통방식의 일들이 현대화라는 명목으로 자동화를 이루며 컨설턴트이란 말이 장인을 대신하게 되었다. 첨단조직은 잠재력과 능력주의를 키웠고, 근로자 스스로가 부단히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시대가 된 것이다. 신자본주의는 정치에도 영향을 미친다. 정치인들은 자신을 표현하기 위해서 갖은 수단을 가리지 않는 인기에만 연연하는 정치가 발생하여 시민은 정치 소비자로 전락해 정치에 무관심하게 된다. 국가의 정치인들은 단지 시민에게 감각적으로 혹은 단기에 인기를 끌기위해 정책을 쉽게 바꿔버린다. 이는 정치인들이 장인의 정신 대신에 기업가처럼 행동하게 됨을 의미하는데, 이에 따라 국민들과 기업가들은 정치적인 불안감을 안고 살게 된다. 이러한 신자본주의 사회를 해쳐나가기 위해서 문화를 통한 각 계층 간의 소통이 중요한 역할을 지니게 될 것이며, 경험을 축적하여 유연적 전문화를 가지는 것은 사회적으로나 개인적으로 중요한 일이 될 것이다.

평가
새로운 자본주의가 우리 사회에 미치는 영향을 면밀하게 조사하고 보여주고 있다. 특히 기존의 관료체제를 군대, 신 유형의 관료체제를 mp3형 조직이라고 빗대어 표현하는 참신성을 보여주고 있다.[3] 또한, 책 전반적으로 개연성이 있을만한 사실에 대해 다른 사회학자의 저서의 내용과 역사적 사실을 인용하여 알기 쉽게 서술하고 있는 점이 매우 마음에 들었다. 또한, 기존의 자본주의 체제의 변화를 종합적으로 정리했다는 것에서 큰 의의를 두고 있다고 생각한다.

시사점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더 이상 평등과 기회를 보장해주지 못한다. 우리나라 또한 IMF 이후 모든 기업들이 신자본주의를 채택하면서 비정규직의 양산과 노동자의 인권이 많이 후퇴한 것이 사실이다.[4] 노동계급은 갈수록 신자본주의를 지향해가고 있어 계급층과 대립각을 점점 더 세우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5]. 국민은 노동계층의 가난이 정치와 관련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이 책을 통해서 이러한 문제는 전 세계적인 흐름이며 그것이 신자본주의의 결과물임을 알 수 있게 한다.

참고문헌
1. 익명. 2009. "Richard Sennet", http://en.wikipedia.org/wiki/Richard_Sennett
2. 데이비드보일, 2005.세계를 뒤흔든 공산당선언유강은 역. 그린비
3. 리처즈세넷. 2009. 『뉴 캐피털리즘』 유병선역. 위즈덤하우스. pp64
4. 김녕. 2004. "한국에서의 신자유주의와 빈곤, 그리고 인권 NGO들의 역할". 현상과인식 통권 93호. p68
5. 조돈문. 2008.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의 경험과 노동계급 계급의식". 경제와사회 통권 제79호. p205

현대예술에서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간의 철학적 논쟁

이번 글을 통해서 현대예술에서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의 관계를 알아보겠습니다. 그리고 두 사조가 매우 다르고 개념상으로 충돌이 많이 일어나기 때문에 철학적으로 논쟁이 끊이지 않았는데, 그러한 논쟁의 내용을 살펴보고 진정으로 두 개념이 어떠한 것인지 파악을 해보도록 하려고 합니다. 먼저 두 사조의 개념을 파악하고, 발생하게 된 배경을 알아본 후, 두 개념이 서로 상반되게 된 이유를 보고 철학적인 논쟁에 대해 고찰해보겠습니다.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의 정의
진행에 앞서 우선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의 정의부터 알아야 할 것입니다. 백과사전에서 정의내리고 있는 두 개념의 뜻은 다음과 같습니다.

모 더니즘 : 근대주의 · 현재주의, 넓은 의미로는 교회의 권위 또는 봉건성에 반항, 과학이나 합리성을 중시하고 널리 근대화를 지향하는 것을 말하지만, 좁은 의미로는 기계문명과 도회적 감각을 중시하여 이른바 현대풍을 추구하는 것을 뜻한다. 예술상에서의 모더니즘은 20세기 초, 특히 1920년대에 일어난 표현주의 · 미래주의 · 다다이즘 · 형식주의(포멀리즘) 등의 감각적, 추상적, 초현실적인 경향의 여러 운동을 가리켜 말한다. 유럽과 미국에서는 이와 같은 여러 운동을 통틀어 모던아트라고 말하는 경향이 많으나 이것을 대국적인 견지에서 말한다면 19세기 예술의 근간이라고 할 수 있는 사실주의에 대한 반항운동이며 1차 세계대전 후에 일어난 전위예술 운동의 한 형태였다.[1]

모더니즘은 현대적이고, 도시적이며, 기존의 종교에만 빠져있던 인간의 무기력함을 타파하고, 이성과 도시적인 현대풍을 중요시한 사조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모더니즘은 이후 여러 현대적인 큰 격변들, 2차 세계대전, 흑인인권운동이 일어난 후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후기 변화된 양식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구체적 정의는 다음과 같습니다.

포스트모더니즘 : 포스트모더니즘은 이성 중심주의에 대해 근본적인 회의를 내포하고 있는 사상적 경향이다. 2차 세계대전 및 여성운동, 학생운동, 흑인 민권운동과 구조주의 이후에 일어난 해체현상의 영향을 받았다. 탈 중심 사고, 탈 이성적 사고가 포스트모더니즘의 가장 큰 특징으로 1960년대 미국과 프랑스를 중심으로 일어났다. 리오타르, 푸코, 보드리야르 등이 대표적인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자이다. 포스트모더니티(Postmodernity)는 포스트모더니즘과는 구분되는 용어로 사용되며, 포스트모더니즘이 발생한 시기의 사회·문화의 접변 현상만을 가리킨다. [2]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더니즘에 비해 다시 이성 중심주의에 회의적으로 변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작가의 내적 표현적인 자유성을 극히 강조하는 경향이 강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모더니즘의 생성배경
모 더니즘이 발생된 배경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모더니즘은 라틴어 모더누스(Modernus)라는 말에서 파생된 것으로 어떤 법칙, 척도, 방식, 형식, 양식에 의하여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일이 있을 때, 그것을 지칭하는 모두스(Modus:영어의 Mode)를 어원으로 한 모더누스에서 파생되었는데, 이 용어들은 19세기 후반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지역의 상황을 포괄하는 특수한 용어로 대두되었습니다. 이 용어가 대두된 역사적 배경은 르 살롱을 이끌어온 프랑스의 아카데미즘이라 할 수 있겠는데, 프랑스 아카데미는 고대 플라톤에 이상을 둔 도덕적 이상을 궁정을 중심으로 당시 사대부들이 이를 숭상했던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3] 이에 대한 현실적인 반영으로서, 산업혁명의 여파로 인한 인구증가, 상업발달 초래, 계층 분화를 가져왔습니다. 이는 마치 오늘날 후기산업사회가 도래하자 전기산업사회의 가치체계들이 부적합하게 된 것처럼 이와 비슷한 현상이 10세기 후엽에 퍼져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당시 살롱의 경향이 매우 이상적, 고전적, 보수적 시각이었던 데 반해 모더니즘은 새롭고, 미래지향적이며 뜨겁고 오늘의 인간을 보여주는, 새로운 것을 희구하는 세대, 계층, 생각, 아이디어의 분출로 표현이 되게됩니다.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의 사이에 나타난 아방가르드 사조19 세기 후엽의 사회에는 살롱 중심의 기득계층의 고대 지향적 낡은 관념에 대한 완전한 차단과 새로운 동경을 지칭하는 말로 무엇인가 모던한 삶, 살아 움직이는 삶을 갈망하여 불어권에서는 ‘예술이 좀 더 모던해야 한다’든지 ‘살아 움직여야 한다’든 지하는 용어가 등장하게 됩니다. 즉 살롱 파들의 미술, 사고, 복식, 한문, 형식등 모든 태도에 있어 이것은 이미 죽었다는 것을 주창하게 됩니다.
역사에서의 격동을 가져올 대사건인 프랑스 혁명에서 2월 혁명에 이르는 민주화 과정에서 1970년대에 인상파가 대두되고, 이후에 사회적 혁명이 배경이 되어 구세대들이 물러가고 신세대들이 새로운 미술과 사상을 이끌어가는 하나의 초기가 바로 19세기 후엽이라고 보면 될 것입니다. 이러한 시각과 배경 하에서 생성된 신생용어가 바로 모던이었던 것입니다. 유럽의 주도적 국가였던 프랑스를 필두로 휴머니티에 대한 새로운 규정과 새로운 가치 설정을 앞세운 전투적, 저돌적 색채의 사회학적 입장의 성향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인상파 발생을 전후한 프랑스의 새로운 사회 사상가들의 등장은 사회 신흥 중상계층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미래에의 동경을 가지고 사회개혁 입장에 서면서 문학, 미술, 철학 등을 중심으로 한 혁신운동을 전투적으로 수행해 나아가게 됩니다. 이때 지금까지 군사용어로 사용되던 ‘아방가르드’란 용어가 사회 사상가들을 중심으로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사상 속에서 새로 도래될 미래에 대한 예지로서 비전 제시 및 형성, 실천으로 나아가는 일체의 운동을 의미하는 용어로 등장합니다. 이는 정치적으로 급진주의가 강하게 대두되면서 뒤이어 문학, 미술 등 예술 모든 분야에 파급되어 전위의 문학, 전위의 미술등 19세기 후반 문예운동에 있어 아방가르드에 접목되었습니다. 모더니즘은 미래 신생사회에 대한 동경에 뜻을 두고 미래에 대한 동경에 뜻을 같이하여 상호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진행되었던 것입니다. 모더니즘은 역설적이게도 19C후반에 제안된 ‘모던’ 개념에 대하여 역행한 듯한 모더니즘 현상이 나타나게 됩니다. 새로운 형태의 모더니즘은 이성, 자아, 자유에 중심한 중세적 낡은 사고와 가치체계에 대해 그 허위성을 폭로하는 운동을 전개 합니다. [3]

포스트모더니즘의 생성 배경학자들과 역사가들의 대부분은 포스트모더니즘을 수많은 모더니즘의 중요한 개념에로의 반발과 차용으로 모더니즘을 확장 또는 대체시킨 사조라고 봅니다. 예를 들어, 포스트모더니즘은 합리성, 객관성, 진보와 같은 이상에 많은 의미를 두었습니다.
Nietzsche는 1872년 에세이 『진리의 열정에 대하여』에서 인간의 기호의 세계의 우연성과 구성성에 대한 우화를 제공합니다. 그에 따르면 우주의 무수히 반짝이는 태양계의 한 구석 한 별에서 영리한 동물들이 ‘지식’을 발명하였는데, 그 지식은 곧 그들이 긍지를 느끼는 ‘세계사’의 미세한 세부에 대한 것이며, 이 별에서 몇 분되지 않아 그 영리한 동물들이 얼어붙어 죽게 됩니다. 니체는 또한 그가 크리스마스 선물로 Cosima Wagner에서 준 같은 해에 『5권의 쓰여지지 않은 책에 대한 다섯 개의 서문』에서 감정을 소유하지 않은 악마가 이야기 하는 우화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 영리한 동물이 죽을 때 그들이 이미 너무나 많은 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들 자신의 지식이 허위라는 것을 발견하고 죽어가면서 진리를 저주한다“라는 내용입니다.[4]
이 두 에세이에서 보듯이 우리는 전 작품에 나타나는 니체의 생각에서 지식과 진리는 다른 것이며, 인간과 같은 미완성한 존재는 진리보다는 지식이 허위인지 진짜인지를 구분하지 못하는 우를 범하는 경향이 크다는 것입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이처럼 우리가 진리를 추구하더라고 진리에 다가서기 위해 지식을 통하기보다 인간 스스로의 내적인 표현에 따르자는 것입니다.

포스트모더니즘과 포스트구조주의
철학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은 포스트구조주의의 영향으로, 예술계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은 사실주의(Realism)와 모더니즘의 반발 작용으로 일어났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두 영역에서 서로 추구했던 점은 비슷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2]
포 스트모더니즘이 철학에서부터 생겨나기 시작한 것은 모더니즘과 구조주의의 반발 작용이었습니다. 구조주의에 대항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그것이 포스트구조주의로 이어지면서 포스트모더니즘이 생겨나게 된 것입니다. 실제 포스트구조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은 상당히 비슷한 개념입니다. 이후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자로 분류되는 철학자들이 생겨나게 되었고, 다양한 이론들이 제시되었습니다. [2]


포스트모더니즘의 발전
포 스트모더니즘의 신봉자들은 종종 포스트모더니즘이 특수한 경제 · 사회적 상황의 결과로써 도출되었다고 주장합니다. 그들이 말하는 ‘특수한 경제 · 사회적 상황’이란 후기자본주의와 방송 매체의 성장 등을 의미하는데, 이러한 상황들이 당시 사회를 새로운 역사적 시기로 진입하게 하였다는 것이 포스트모더니즘 신봉자들의 주장입니다. 그러나 수많은 사상가와 저술가들은 이러한 주장에 대해 포스트모더니즘은 단지 모더니즘의 확장일 뿐이지, 그 자체로 새로운 시대나 사상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2]

모더니즘에 대한 비판리 오타르의 포스트모더니즘은 지식의 정보화가 이루어지고 있는 선진 정보화 사회, 후기 산업사회에서 메타이야기는 더 이상 신뢰될 수 없다는 전제에서 출발합니다. 그에 따르면 개별적인 사유 및 행위의 정당화는 거대 혹은 메타 이야기에 의해 이루어집니다. 리오타르는 사상의 변천사를 주목하면서 이런 정당화 이야기의 모형을 기독교적 이야기, 계몽의 이야기, 사변적 이야기, 마르크스적 이야기, 자본주의적 이야기로 세분합니다. 이는 중세 기독교적 이야기는 사랑을 통해 아담이 저지른 원죄로부터의 해방을, 근세 계몽의 이야기는 지식과 평등주의에 의해 무지와 예속으로부터의 해방을, 헤겔류의 사변적 이야기는 구체적인 것의 변증법에 의해 보편적 이념의 실현을, 마르크스적 이야기는 노동의 사회화를 통해 부르주아지의 착취와 소외로부터의 해방을, 자본주의적 이야기는 기술 산업적 발전을 통해 경제적 빈곤으로부터의 해방을 각각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거대 이야기들이 궁극적으로 의도하는 것은 ‘보편적 자유와 전 인류의 해방’이며, 이것이 바로 ‘모던의 기획’(projet moderne)이라고 리오타르는 주장합니다.[5]

리 오타르에 따르면, 이런 해방과 계몽의 이야기들은 신화들과 마찬가지로 제도·사회적이고 정치적인 관행, 입법, 윤리, 사유양식을 정당화하는 기능을 갖고 있는 이야기들입니다. 그러나 신화와는 달리 메타이야기들은 일어날 미래, 즉 실현될 이념 속에서 그 정당성을 찾습니다. 자유, 계몽, 사회주의, 전반적인 부유 화와 같은 이념들이 정당화 가치를 갖고 있는 것은 그것이 보편적이기 때문이며, 그것은 모든 인간 현실성을 지향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리오타르는 그것에 의해 모더니티에게 특징적인 양식, 즉 하버마스가 말한 목표를 지향하는 의지를 의미하는 기획이 부여된다고 하면서, 보편성의 실현이라는 모던의 기획은 포기되거나 망각된 것이 아니라 파멸되고 청산되었다고 주장합니다.[6]
메타이야기들 혹은 메타주체가 탈정당화의 위기에 처한 포스트 모던적 상황 속에서 일상적인 삶의 직물을 짜는 것은 이제 수많은 작은 이야기들이라고 리오타르는 생각합니다.[7]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의 충돌20 세기 후반의 시대정신으로서의 포스트모더니즘은 후기 자본주의 사회에서 산업화를 통한 전반적인 예술의 흐름이었습니다. 신 조류였던 포스트모더니즘, 그리고 그 이전의 모더니즘은 서로 상반된 스타일로 인하여 많은 충돌과 논쟁을 야기 하였습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용어 자체가 역사학적 구분에서의 근현대에 스쳐간 수많은 것들을 포함하기 때문에 학자, 지식인, 역사가 사이에서 그 정의를 두고 극한 논쟁이 일고 있는 개념이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포스트 모던적 생각이 철학, 예술, 비판 이론, 문학, 건축, 디자인, 마케팅/비즈니스, 역사해석, 문화 등 다방면에 걸쳐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에는 대부분 동의하고 있습니다.[8]
포스트모더 니즘은 일률적인 것을 거부하고 다양성을 강조하였으며, 이성을 중시하며 등장한 모더니즘이 추구한 정치적 해방과 철학적 사변도 하나의 이야기(거대 서사 혹은 큰 이야기)에 지나지 않음을 강조했습니다. 또한, 칸트가 순수 이성이 만들어낸 산물이라 했던 이념의 실현을 불가능하다고 주장함으로서 정치철학에도 막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2]
19세기에 장밋빛 삶을 약속한 해방과 진보라는 계몽의 이념이 20세기를 마감하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가라는 질문은 간단하게 대답될 수 없을 것입니다. 기존의 모더니스트들은 모던이 아직 완성되지 않은 작품이라고 주장하는 반면,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이제 모던의 이상은 그 효력을 상실했으며, 그래서 모던은 ‘포기’가 아니라 ‘청산’되어야 할 유물이라고 반박합니다. 모더니스트들은 사회적인 실천을 등한시하고 있는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을 신 보수주의자 또는 신비합리주의자라고 매도하고 있는 반면,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이런 비판을 부정하면서 오히려 그러한 주장을 하는 이들은 헤겔적인 통일성과 전체성을 지향하는 전체주의자라고 비난합니다. 그렇다면 1970년대부터 가열된 모던과 포스트모던의 논쟁 혹은 모더니스트와 포스트모더니스트 간의 논쟁은 ‘고대인과 근대인의 논쟁’과 유사한 형태를 띠고 있는가? 포스트모던은 모던이라는 거인의 어께위에 앉아있는 난장이에 불과한가? 파스칼과 베이컨이 그랬듯이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모더니스트들보다 더 많이 알고 있는가? 근대가 고대 및 중세의 전통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했듯이 포스트모던의 이상은 단지 모던으로부터의 해방인가? 모던과 포스트모던은 합치될 수 없는 끝없는 평행선을 서로 고집하고 있는 것인가? 포스트 모더니스트들은 왜 모던이라는 단어 앞에 ‘포스트’라는 접두사를 첨가했으며, 또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모던에 대한 어떤 불만을 해소하고 있는가? 포스트모더니즘은 유령처럼 나타났다가 신기루처럼 사라질 사조에 불과한가? 이런 문제의식 속에서 우리는 두 사조에 대한 우회적 비판을 검토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1980년 하버마스가 “모던-미완의 기획”이라는 아도르노 상 수상강연문에서 포스트모더니티를 비판하자, 리오타르는 1982년 “질문에 대한 답변: 포스트모던이란 무엇인가?”라는 글을 발표하면서 논쟁의 불이 붙게 되었습니다.[9]

리 오타르는 1987년 한 인터뷰『포스트 모던적 조건』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전개된 나의 입장에 대한 공격과 비탄은 사실상 일반화하고 총체화되는 이성개념의 일부분이다. 나는 나를 비판하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이성적인 것으로 보이는 다음의 원리를 제시함으로써 그들을 비판할 수 있다. 즉, 하나의 이성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다수의 이성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점에서 나는 칸트의 모델에 의존하고 있으며, 전적으로 그와 일치하고 있고, 더 나아가 상당할 정도로 비트겐슈타인의 의견과도 일치하고 있다”[10]고 강변하고 있다.

우리는 리오타르의 포스트모더니즘의 성격을 대략적으로 감지 할 수 있습니다. 리오타르에 따르면, 모던이란 자신을 정당화하기 위해 메타이야기에 호소하는 시대정신이지만, 그 반면 포스트모던은 메타이야기를 불신하는 사유양식이라는 것입니다.[10]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비판포 스트모더니즘에 대한 비판으로는 ‘모더니즘이 대표하는 이성이 좀 더 시대를 이끌어 나가야하는가? 이성이 도구로 변질 되어버린 시점에 굳이 포스트모더니즘을 받아들여야 하는가?’ 하는 반박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포스트모더니즘은 하나의 사상이며 모더니즘 이전에 이미 존재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무시한, 일종의 시대착오로 비판받을 만한 것입니다.[2]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간의 논쟁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은 성격의 모호성과 여러 모호한 의미적 중의성 때문에 접근하기가 쉽지 않았고, 일부 논자들의 정돈되지 못한 시각 때문에 혼란이 초래되기도 하였습니다. 모든 철학은 허공 속에서 돌연히 탄생하지는 않습니다. 포스트모던 철학이 어떤 시대적 특징의 반영이며 표현인가가 논란의 대상이 됩니다. 바꿔 말하면 학제적으로 광범위하게 전개된 포스트모던 논쟁이 이론적으로 정립이 힘들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포스트모던 논쟁이 실전적인 효과를 가져왔는가? 어떠한 현실적 상황이 우리사회에서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논쟁을 불러일으켰으며, 그것이 어떠한 이데올로기적 효과를 생산했는가? 에 대해 생각해보아야 할 것입니다.[2]

포 스트모더니즘을 반대하는 하버마스의 경우에는 기존의 것과 차이를 강조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을 사회적 실천의 대안이 결여된 신보수주의자라고 매도하고, 상호 이해가능성이라는 측면에서 인식, 실천, 미학의 영역 사이의 의사소통 가능성을 추구하고, 이렇게 함으로써 인류의 진정한 해방과 사회적 진부가 가능하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9] 다시 말해서 하버마스는 포스트모더니즘에서의 논의는 논제가 주어지지 않은 채로 메타 이야기가 사라진 사회에서 보편주의와 충돌이 일어나지 않겠는가라고 보고 있다는 것입니다.[9]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의 다른 시각
리 오타르는 아주 분명하게 포스트모던이 모던의 일부분이라고 주장합니다. 다시 말해서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더니즘의 종말이 아니라 지속적인 탄생이라는 것입니다.[9] 따라서, 포스트모더니즘에 있어 포스트를 전향, 즉 이전의 것 다음의 새로운 방향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전적으로 모던적인 사유방식이라고 리오타르는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모던이라는 개념자체가 전통과 단절하고, 완전히 새로운 삶의 방식과 사유방식을 지향하는 것이 가능하고 필연적이라는 원리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리오타르는 전통과의 단절이 오히려 과거를 망각하고 억압하는 방식이 아닌지 혹은 과거를 넘어서기 보다는 단지 반복하는 방식이 아닌지 하는 의문을 제기합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사용하고 있는 포스트의 의미는 컴백, 피드백, 플래시백의 운동, 즉 반복 운동이 아니라 분석, 상기, 재생, 변형에 있어 원초적인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10]
그러므로 리오타르에 있어 포스트의 의미는 모던과의 단절이나 단순한 반복이 아니라, 모던이 추구한 것을 상기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포스트모던은 모던을 ‘다시 쓰는’ 것입니다. 즉, “모던도 이른바 포스트모던도 어떤 역사적인 요소에 따라 분명하게 확인되거나 규정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포스트모던이 모던 이후에 오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되며, 오히려 포스트모던은 모던 속에 내포되어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던이라는 시간성은 그 자체 속에 자신과는 다른 상태로 넘어가려고 하는 역동성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10] 그래서 포스트모던에서 포스트는 '이후‘가 아니라 ’다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의 작업은 표현할 수 없는 것을 가시화시키고, 새로운 관념을 창안해내고, 새로운 언술규칙을 발견해내는 것입니다. 이런 작업은 기쁨이 아니라, 오히려 고통을 수반하는 기쁨을 초래하는 숭고의 작업이며, 이런 작업을 과감히 수행하는 자는 포스트모더니스트로 간주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합니다.[9]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이렇듯 철학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포스트모더니즘이 예술에 끼친 영향도 컸습니다. 예를 들어, 미술, 음악의 대중화와 미술에서 등장한 팝아트와 비디오아트, 음악에서 등장한 랩과 같은 장르의 발생을 들 수 있고, 이러한 장르는 기존의 예술과는 매우 다르게 개성이 넘치고 자율적이며 다양하다는 특징이 있는데 이는 포스트모더니즘과 부합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문학에서는 장르의 벽이 느슨해지고 전지적 시점보다는 다른 시점을 채택함으로써 현실감을 증대시키고 독자의 상상력을 중시하게 됩니다. 소설 따위의 마지막에 약간의 여운을 남겨두고 독자를 생각하게끔 하는 것도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으로, 작가 위주의 문학에서 벗어나 독자가 능동적으로 읽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특징입니다.[2]

마무리
이상의 논의에서 두 대립적인 시각사이에 ‘상호이해의 한계’가 있을 지라도 포스트모더니즘이 모더니즘의 계승이라는 측면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이 반 모더니즘이나 모더니즘의 이후로 파악될 수 없습니다. 둘 다 인간이 억압과 지배로부터 해방된 자유로운 삶을 영위하는 것을 그 목표로 살고 있다는 점에서, 양자는 엄밀한 의미에서의 해방 이념을 수용하고 있는 셈입니다.[9]
우리가 생각하는 모던은 무수히 많은 의미를 뜻하고 있습니다. 정치 사회 문화로 퍼져있는 인간의 모든 활동에서 모던함이라는 것이 쓰이고 있는 것입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그러한 모던의 새로운 재 정의이며 가치를 가지려는 인간의 사유과정에서 나온 산물입니다. 철학적으로 구시대의 발명품과 차이가 있을지언정 부단히 노력하려는 인간의 사유 활동의 하나로서 포스트모더니즘은 중요한 인간의 유산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참조
1. 두산백과사전『모더니즘』 두산동아 vol 12, 1983, p70
2. 위키디피아『포스트모더니즘』
3. 김복영.『한국현대 미술과 모더니즘』원구식 역, 북악청년미술아카데미, 1992
4. 김영민.『다시 본 포스트모더니즘:Nietzsche, Heidegger, Derrida』한국영어영문학회 제39권 3호. 1993
5. 리오타르.『지식인의 종언』이현복 역. 문예출판사. 1993. 93쪽 참조
6. 엄정식,『현대철학 특강』철학과현실사. 1999
7. 이현복. “리오타르: 차이의 철학과 해방의 미학” http://blog.aladdin.co.kr/780426173/2572274. 2009
8. 윤평중. “왜 지금 여기서 포스트 모던 논쟁인가?”『모던과 포스트모던의 논쟁』철학연구회. 1993
9. 이현복. “거인의 어께위에 앉아 있는 난장이?”『모던과 포스트모던의 논쟁』철학연구회. 1993
10. 리오타르.『포스트모던적 조건』이현복 옮김. 서광사. 1992

데이터베이스 전문가로서의 직업적 책임과 윤리적 책임에 관한 의견

데이터베이스 전문가에게 직업윤리가 필요한가? 정말 필요한 것인가? 물론이다. 윤리는 일을 수행하는데 있어서, 정책을 세우고 서비스 전략을 개발하는 이면에 사회적 이익으로서의 틀로 제공될 수가 있다. 데이터베이스 전문가의 마음가짐에 따라 누구는 정보를 가지고 누구는 정보에 소외당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될 수도 있다. 따라서 평소에 전문가가 현장에서 일을 하는 과정에 윤리적인 결과를 의식적으로 생각하지 않고, 지침이나 경험, 습관에 따라 일을 하게 될 때, 종종 일의 결과가 어떤 윤리적인 논란을 가져오게 될 것이다. 그러때에 윤리관이 확립이 되어있지 않다면 전문가들은 갑작스런 문제에 직면하여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하고 혼란에 빠지게 된다. 따라서 데이터베이스 전문가는 현장에서 일어나는 제반 업무 수행과정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대해 사전에 깊이 고민하고 그에 대한 명확입장을 구명하고 구체적인 행동을 정리한 직업윤리를 가져야 할 것이다. 그래야만 전문가들이 이용자 개개인과 사회의 전반적인 진보와 발전에 기여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오늘날 컴퓨터가 없는 세상은 상상도 할 수가 없을 것이다. 눈뜨고 밖을 나가보면 보이는 세상은 온통 컴퓨터와 데이터로 이루어진 전자 기기들 뿐이다. 전자기기는 디지털 데이터를 언어적 매개체로 소통을 하지만 그러한 데이터도 결국 모이게 되면 일정한 정보를 이루게 된다. 결국, 우린 정보의 홍수 속에서 내던져진 사용자이다. 데이터베이스는 그러한 정보를 관리하기 위해서 나타났다. 기존의 비효율적인 수작업의 방식에서 벗어나 인간 스스로가 보를 다루기 위한 도구를 만든 것이다. 데이터베이스는 인간이 다루지 못하는 많은 데이터를 다룬다. 눈으로 볼 수도 없고, 만질 수 없는 디지털 정보이기에 더더욱 알 수 없다. 데이터베이스의 등장은 우리의 삶을 크게 바꾸어 놓았다. 여러 명이 수일동안 해야 할 일을 데이터베이스는 단지 관리자 한명이 버튼 몇 번으로 끝내버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데이터베이스 전문가는 직업적인 책임에 충실하여야 한다.
길을 운전하다가 마주치는 CCTV, 학교의 시간표, 물건을 구매할 때 찍히는 바코드... 우리가 쉽게 접할 수 있는 모든 시스템들은 정보를 생산하는 도구이며, 모두 데이터베이스로 연결 되어있다. 오늘날은 IT시대이면서 데이터베이스 시대인 것이다. 지속적으로 디지털과 통신기기가 거대해짐에 따라 데이터베이스는 하나의 기능이면서 동시에 IT서비스 자체의 핵심으로 대표하게 되었다. 또 그러한 사회적 현상에 따라 정보의 선택에서부터 그의 제공에 따른 다양한 문제들이 데이터베이스를 다루는 기업 혹은 전문가 집단과 이를 이용하는 이용자 간에 윤리적인 갈등을 야기하고 있다.
요즘 들어 정보를 다루는 기업들이 데이터를 잘못 다루어 씻을 수 없는 오명을 남기는 사례 도 적지 않다. 이러한 윤리적 문제가 지속적으로 나타나는 것도 데이터베이스 전문가의 직업적 책임과 윤리의 필요성을 더욱 강화하고 있다. 최근 들어 RFID의 도입이 증가하고, 게임을 즐기기 위해 가입한 정보가 해커에 의해 외국으로 유출이 되며, 통신회사의 가입자의 정보를 무단으로 빼돌려 마케팅에 활용하는 등, 시스템보안과 맞물려 데이터베이스의 정보를 자의든 타의든 함부로 사용이 되는 문제에 의해 사회적 관점에서 갈등과 충돌을 일으키고 있다. 이렇듯 새로운 시대, 특히 모든 것을 효율이라는 이름하에 디지털을 도입하고, 기술지상주의와 전자감시체제 등의 도입으로 인한 개인의 자유와 프라이버시 침해 사례의 급증 등이 새로운 윤리의 확립과 이를 통한 사회적인 인식의 활성화를 요구하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데이터베이스 전문가에게 직업적 윤리적 책임이 필요한가? 필요하다. 만일 전문가 스스로 자신들이 이 시대에 정보부문에 있어 전문가라고 생각한다면, 그리고 자신이 하는 일이 사회적으로 고객과의 신뢰를 바탕으로 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면, 윤리적인 관점은 반드시 필요하다.
데이터베이스 관리자의 책임을 정의할 때 이같이 직업적인 관점과 윤리적인 관점의 2가지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첫 번째, 직업적인 관점에서는 관리자 스스로 데이터베이스다루면서 전문가로 활동하는데 적용되는 원칙이다. 주로 사용자와 직장동료간의 문제와 개인의 업무의 체계와 관련이 깊다고 보여진다. 두 번째, 윤리적 관점이다. 이는 전문가로서 활동하면서 적용되는 윤리적인 원칙들을 포함하는 것으로, 고객과 데이터의 소유자와의 관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두 가지의 관점은 서로 상호적으로 겹치면서 관리자에게 필수적으로 요구되어 지는 것이다.
여기서 몇 가지 데이터베이스 전문가로서 직업적인 의식 몇 가지를 짚어보고자 한다.
첫 번째, 철두철미한 일처리로 매사에 임해야 한다는 소명의식을 가지고 전문성에 중점을 두어야한다. 이는 데이터베이스 전문가뿐만이 아니라 모든 전문가가 투철한 직업관으로 자신의 전문성을 지켜야 한다.
두 번째, 데이터베이스 영역은 여러 다양한 영역에 걸쳐있으므로 두루두루 연관관계를 알아야 한다. 이는 데이터베이스가 실제 기업업무에서 핵심의 역할을 하기 때문에 전문가는 데이터베이스 뿐 아니라 연결된 전반적인 업무의 체계에 대해서도 파악할 줄 알아야 한다.
세 번째, 악의적인 위협대상으로부터 데이터베이스를 보호할 수 있도록 철저한 대비를 하는 능력이 필요하다. 데이터베이스에는 기업 혹은 개인의 모든 정보가 담겨있는 것이다. 이를 이용하려고 악의적으로 접근하는 사람이 있다면 관리자는 필히 이를 보호할 책임이 있다.
전문가는 평시에도 지속적인 노력으로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고 이를 방비해야 한다.
네 번째, 데이터를 처리하기에 앞서 개인의 권리를 존중해야 한다. 개인의 대한 존중은 관리자나 이용자도 모두 독립적인 개인으로서, 타인의 존엄성을 위협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자신도 그와 같은 존중을 받을 권리가 있다는 것이다. 만일 데이터의 정보가 범죄자라 하더라도 관리자는 이에 대해 경찰에 그 정보를 건네줘야 하는 상황에서는 이에 응하는 것이 윤리적인 결정일 수도 있으나, 개인에 대한 존중의 관점에서 보면 개인의 프라이버시 침해의 소지가 있기 때문에 거절하는 것이 바람직한 태도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전문가가 포함된 기업의 자체적인 윤리적인 기준도 필요하고, 전문가는 이를 적절하게 논의할 책임을 가져야 할 것이다.
이 상의 데이터베이스 전문가의 직업적 의식은 모든 IT업계에 종사하는 전문가들의 필요성과도 일치하는 부분이 많다. 하지만 데이터베이스는 업무프로세스의 중추를 담당하기 때문에 다른 IT전문가들과는 차별화한 확고한 직업의식이 요구된다고 볼 수 있다.
데이터베이스는 빠르고 신속하며 간편하지만, 한편으로 문제점도 있다. 악의를 가진 관리자는 쉽게 데이터베이스를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바꿔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데이터베이스의 많은 데이터들 중 한 개의 데이터를 바꾸는 것은 쉬우면서도 사회적인 영향가져다 줄 수 있기 때문에 위험하다. 이 때문에 데이터베이스 전문가의 윤리적인 의식도 중요한 가치로 작용이 될 것이다. 윤리적인 덕목을 몇 가지로 나누어보자면,
첫 번째, 자기 스스로가 공정한 기준을 가지고 있다고 자신해야 한다. 공정한 기준을 따지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공정한 기준이 무엇인가 자신의 내면에 그 기준을 확고히 가지고, 넓게 사회적인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일이 사회에서 어떠한 영향을 끼치게 될 것인지 곰곰이 따져야한다. 검색 엔진을 예로 들어보자. 회사는 검색엔진을 만들면서 사용 자에게 공정한 웹페이지의 순위를 보여준다고 약속을 하면서도, 이익을 위해 검색 알고리즘을 바꿔 자신의 회사에 돈을 준 회사를 가장 상위에 배치시킨다. 회사는 많은 노출을 가능하게 되면서 매출에 이익이 되겠지만 정작 사용자에게는 쓸데없는 정보를 찾게 되면서 시간을 낭비하게 된다.[1]
두 번째, 사생활 정보를 중요하게 생각하여 함부로 취급하지 않아야 한다.
얼마 전 하나로통신이 고객의 정보를 함부로 공개하고, 마케팅업무로 활용하는 바람에 징계를 받은 일이 있다. 회사의 이익을 위해 고객의 정보를 활용하였다. 물론 이러한 판결이 나오기 전에도 대부분의 회사가 공공연히 고객의 데이터를 몰래 활용한 것도 사실이다. 개인의 정보가 누출이 되면 그 정보는 이익집단의 손에 의해 함부로 취급이 될 우려가 커진다. 데이터베이스를 다루는 전문가는 이러한 것에 윤리적 기준을 두고 확고한 신념을 가져야 할 것이다.[2]
최근 IT의 사건사고는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다. 그 속에서 잘못을 찾기 보다는 IT의 의식수준을 좀 더 보완하고, 교육하는 일이 무엇보다 우선시 되어야한다. 세상은 점점 복잡해지고 기계를 대체할 수단을 점점 줄어들고, 모든 정보는 디지털화 되어간다. 디지털화가 될수이터베이스는 중요한 도구로서 인류에게 편리한 정보를 빠르고 쉽게 제공해주고 있다. 런 때일수록 데이터베이스 전문가는 직업적 윤리적 책임을 깨닫고 이를 실천해야 할 의무를 가지고 있다. 직업적인 책임의식으로서 첫 번째, 철두철미한 일처리로 매사에 임해야 한다. 두 번째, 데이터베이스 영역은 여러 다양한 영역에 일의 연관관계를 알아야 한다. 세 번째, 악의적인 위협대상으로부터 데이터베이스를 보호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다. 직업적인 차원에서 데이터베이스 전문가는 주변 동료와 회사와 이용자 간에 원활한 중재역활자로서 기능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윤리적 책임의식으로서는 첫 번째, 자기 스스로가 공정한 기준을 가지고 있다고 자신해야 한다. 그리고 두 번째로 사생활 정보를 중요하게 생각하여 함부로 취급하지 않아야 한다. 구체적인 예와 함께 사회에서 발생된 여러 사건을 접하면서 우리가 얼마나 데이터베이스의 윤리적 문제를 쉽게 주변에서 만날 수 있는지 알 수 있다.
이제 사회적으로 직업적 윤리적 가치관에 따라 행동을 바탕으로 하지 않고서는 개인이나 전문가는 물론 정부와 같은 공공영역 나아가 상업적 영역의 기업들까지 살아남기 어려운 시대이다. 데이터베이스 전문가들도 이러한 시대의 흐름을 따르지 않고서는 새로운 시대의 건실한 전문가로서 살아남기 어려울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는 더욱 그 책임이 강조될 것이다.

Reference
1. ˝MSN등 8개사, 돈 받고 검색순서 조작, 한겨레신문, 2001/07/18
2. “하나로 텔레콤, 가입자 정보 적극 활용하라 지시”, 베타뉴스, 2008/04/23